‘시간을 잃어버린 마을 수동’2

게딱지처럼 낮은 지붕들이 처마를 맞댄 수동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어느덧 청주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우암산 중턱이다. 박갑순(78)할머니의 집은 수동 달동네에서도 유난히 눈맛이 시원한 곳에 있다. 안방 문을 열거나 좁은 툇마루에 앉으면 전망대가 따로 없다. 안방 바닥은 절절 끓는 방구들이다.

▲ 박갑순 할머니가 남편인 故 김기훈 옹과 자신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주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사진=육성준 기자 그래서 박 할머니의 집에는 언제나 손님이 끊일 날이 없다. 고샅길을 따라 인근에 혼자 사는 할머니들은 물론이고, 지금은 수동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간 할머니들까지도 할머니의 집으로 마실을 온다. 이런 박 할머니의 집을 손님들은 ‘중간경로당’이라고 부른다. 사실 할머니집에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유난히 낙천적이면서도 은근히 남을 이끄는 리더십 때문이다. 2005년 10월14일 마침 우암동에서 할머니의 집으로 마실을 온 최계순(73)할머니는 “나는 맨날 언니 집에서 먹구 살어. 언니가 여장부니까 다 좋아하는 거지 뭐”하며 취재를 거드는 말로 그날 밥값을 치렀다. 쉴 새 없이 농을 걸고 환한 웃음이 가시지 않는 박 할머니의 얼굴에서 80평생 그 어느 모서리에도 어둡고 그늘진 날은 없을 것만 같았다. “얼굴 찌그리고 있으면 누가 알아줘?” 그러나 할머니가 지난 날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하자 결코 평탄치 않았던 과거사가 굽이굽이 이어졌다. 5.16쿠데타가 일어나 군인들이 행정에 개입하자 눈꼴이 사나워 공직에서 물러난 뒤 병치레가 잦았던 남편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바느질 품을 팔아온 40년 세월은 감동적이면서도 진진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어느 구석에도 고생길을 깔아준 남편에 대한 흉은 없었고 의롭게 산 남편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남편 고 김기훈옹은 2000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외벽 기둥에는 아직도 옛 문패가 걸려있었다. 또 그 옆에는 박 할머니가 청주시노인종합복지회관(수동 소재) 한글학교에 다니면서 지점토를 이용해 손수 만든 자신의 문패가 나란히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남편 명줄 잇기 위해 이사 온 수동
박갑순할머니가 수동으로 이사를 온 것은 1965년 무렵이다. 당시 50대 초반이던 남편 고 김기훈옹이 중병을 앓아 병원에서 수술을 권유했지만 돈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를 때, 용한 점쟁이가 ‘좋은 방위로 이사를 가야 명줄을 이을 수 있다’고 점괘를 내려 지금의 집을 3만5000원에 구입해 이사를 왔다는 것이다.

“남편이 병을 얻게 된 것은 홧병에 가까웠다”는 것이 할머니의 설명이다.
충북 도내 시·군에서 행정공무원으로 근무했던 남편이 제원군에서 금성면장을 지낼 당시, 1962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행정에 참여한 군인들이 군수에게까지 반말을 쓰며 거들먹거리는 것을 참지 못해 사표를 던진 뒤 하는 일 마다 풀리지 않아 속병을 얻었다는 것이다.

“1년 동안 고향인 괴산군 청천면에 들어가 농사를 짓다가 때려 치우고 다시 청주로 나와 ‘서민금고를 한다, 주식투자를 한다’며 3대 충북도지사를 지냈던 이명구씨 등과 어울려 다니다 2년이 흘렀지.” 일제강점기에 잠시 경찰 공무원을 했던 남편 김기훈옹은 일본인 행세를 하며 동포들을 괴롭히던 동료 순사들을 보면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를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다고 한다. “그때 순사들이 청결검사를 한다고 돌아다니면서 일본인인 것처럼 행세하며 동포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았데. 그러면 남편이 그 꼴을 보지 못하고 매번 주먹을 휘둘러 곤란한 처지에 빠진 경우도 있었다고 하더라구.” 할머니는 일제가 물러가면서 알고 지내던 일본인이 집을 물려주려 했지만 남편이 이 조차도 받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박갑순 할머니의 방에는 가정의 생계를 지켜온 낡은 재봉틀이 한구석을 굳게 지키고 있다. / 사진=육성준 기자
삯바느질로 살아온 40년 세월
할머니는 직장을 잃고 병까지 얻은 남편을 대신해 한복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낡은 전동 부라더미싱이 안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발로 구르는 구형 재봉틀 석 대가 박 할머니를 거쳐갔다.

94살에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져 7년을 누워있었는데 대소변을 다 받아내는 등 기꺼이 병수발을 해 청주시에서 주는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이 집으로 이사와서 남편이 35년을 더 살았어.” 할머니는 오랜 삯바느질로 고통스러운 요통과 다리 신경통을 얻었지만, 점괘가 들어맞았다는 안도감에 지금도 느꺼워하고 있었다.

“한참 잘 나갈 때는 잠도 못자고 일했어. 그냥도 주문이 들어오고 한복집에 납품도 해야 했거든.”

4~5년 전부터 할머니는 한복 대신 수의를 깁고 있다. 신경통도 신경통이지만 이제는 눈이 어두워 곱고 섬세한 바느질은 어렵기 때문이다. 1년 전부터는 수의 제작도 힘에 부치는 작업이다. 예전에는 하루에 한 벌은 만들었는데 지금은 하루 반이 꼬박 걸린다고 한다.

   
요즘 할머니는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밥을 짓거나 국수를 말아 대접하고 시간이 나면 마을 아래에 있는 노인종합복지관의 한글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다. 일제 때 소학교를 나왔지만 한글이 아닌 일본어를 배웠기 때문에 ‘받침’에 약하다는 것이 할머니의 설명이다.

“받침을 몰라서 다니는데 맨날 ‘가갸거겨’만 해서 재미없어!” 그렇지만 한글반 초대 반장을 역임했다는 할머니의 표정은 10대 소녀처럼 마냥 즐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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