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기자시절이던 1992년 9월 27일 나는 역사적인 한·중 정상회담 취재를 위해 노태우 대통령을 수행, 북경엘 갔습니다. 그보다 한 달 전인 8월24일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인 수교가 이루어지고 이를 계기로 양국정상이 상견례를 위해 정상회담을 가졌던 것입니다. 천안문 광장에 내 걸린 태극기는 공산주의 중국의 심장부에 대한민국의 국기가 꽂혔다는 상징성으로 하여 수행원들을 설레게 했고 임기 중 국교를 수립하게된 노 대통령은 그런 역사성 때문에 몹시 흡족해 했습니다.
정상회담은 두 나라가 함께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첫 출발을 하는 터라서 우호적으로 진행됐고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기자들의 관심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권력구조는 양상곤이 국가원수이긴 했지만 실제 최고 실력자는 등소평 이였기 때문에 과연 노 대통령이 등소평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또 하나는 1950년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에 대한 사과를 받아 낼 수 있느냐의 여부였습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등소평을 만나지 못했고 한국전 참전은 사과를 받기는커녕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중국 측은 한국의 두 가지 요구를 모두 거절했던 것입니다. 후일담이지만 당시 우리 외교 진 은 등소평 면담을 애걸하다시피 간청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꼭 10년이 지났습니다. 한·중 수교 10주년을 맞아 신문 방송들은 다투어 대차대조표를 펴놓고 수교 10년을 결산하느라 분주합니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지, 빛과 그림자는 무엇인지, 그 계산이 한창인 것입니다.
지정학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중국대륙은 한반도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2시간 30분이면 수도인 북경에 도착하는 지근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과거의 중국은 홍콩이나 도쿄, 모스크바를 거쳐 돌아 가야하는 먼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수교10년, 지금 한국과 중국은 이웃집이라고 할 만큼 두 나라 사람들이 제 집 드나들 듯 오고 갑니다. 작년 한해 중국을 방문한 한국인은 129만 7000명이며 한국에 온 중국인은 48만 2000명이라고 합니다. 현재 중국에서 사업을 하거나 유학중인 한국인은 13만 명, 한국 내 중국인은 22만 명입니다. 항공노선도 1주에 220회나 왕복 운행되고 있습니다. 수교10년 만에 두 나라관계가 얼마나 밀접해 졌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우리에게 미국 다음의 교역국이 되었습니다. 지난해 대 중국 수출은 182억 달러, 투자는 58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13억 인구의 광활한 대륙 중국은 황금을 캐내는 무한한 시장이요, 가능성의 땅입니다. 이미 중국의 젊은이들에게 ‘한류열풍’이 휩쓸고있고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로 한국이 첫 손가락에 꼽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밀 듯이 밀려오는 ‘메이드인차이나’ 는 온통 우리 기업들을 무너뜨리고 있으며 제상(祭床)까지 장악한 중국산 농산물은 공포의 대상이 돼 농민들의 목을 조이고 있습니다. 매사가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듯 경제교류 역시 이중성을 띄고 있는 것입니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합니다. 세계가 한 지붕이 된 글로벌시대에 두 나라는 가까우면서 먼 나라가 아닌, 가까워서 더욱 가까운 나라로 우호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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