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 불어온다.

가을은 과일 익어가는 단내로, 온 산야를 곱게 물들이는 따스한 햇빛살로, 달빛이 고운 가을밤! 가슴을 파고드는 풀벌레소리로 바람 속에 사랑의 밀어를 품고 온다.

이런 가을날, 며칠동안 누군가에게 전화 한통 오지 않고 또 아무도 찾아 주는 이 없고, 아무 할일도 없이 우두커니 혼자 빈방만 지키다가 그 지독한 외로움에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 광활한 천지에 나 홀로 서성이다 허전해서 너무도 허전해서 멍하니 공허한 하늘만 바라보고 서있다. 바라만 보아도 푸른 물 뚝뚝 흘러내릴 것만 같은 맑고 투명한 하늘색! 그 도도한 빛깔에 한참 넋을 놓았다.

멀리서 비행기소리 여운처럼 들려 왔다. 어디로 가는 여객기일까?

이별과 만남의 통로.

만남은 헤어짐의 시작이요, 헤어짐은 만남의 기다림이 가슴으로 여울지는 우리들의 삶!

비행기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잔영처럼 소리만 내 가슴을 비워냈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시나브로 뿌옇게 흐려져 왔다. 내 곁에 영원히 머물 거라고 생각해 왔던 모든 것들이 모두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는데, 오늘 와 다시 보니 아무것도 없다. 그저 머릿속에 잔영으로 남아 가슴만 애련하다. 애련해지는 가슴 누를 길 없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도심 한 복판에 서 본다.

하늘, 땅, 거리, 사람들 모두가 낯설다. 내겐 그들이 도저히 뛰어 넘을 수도 부셔버릴 수도 없는 견고한 벽처럼 보였다. 그 벽들이 한꺼번에 우우우 몰려와 작은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빛 한줄기 들어 올 수 없는 사방이 벽인 캄캄한 공간 속에 갇혀 버린 듯한 느낌, 낯익은 어제를 보내고 낯선 오늘을 맞이하는 두려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혼자인 느낌! 어둠이 두렵고 해뜨는 아침이 두렵다.

가을바람은 선선히 불어오는데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며 나는 온 몸으로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주택가 골목 안은 예닐곱 살 난 어린아이들의 노는 소리로, 젊은 아기 엄마가 아가에게 주의를 주는 소리, 때도 모르고 놀기만 하는 개구쟁이들에게 저녁 먹으라고 질러대는 고함소리들, 봉고 트럭에 저녁 찬거리를 싣고 와 주부들을 불러대는 장사꾼들의 외침소리들로 시끌벅적 했다. 나도 그들 틈새에 끼워 달라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소리 질러 댔지만 그들 중, 아무도 절절한 내 절규를 듣지 못했다.

구월답지 않게 한낮의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태양도 미련처럼 석양빛 토해내며 하루를 접어가던 시간! 골목 안은 시나브로 고요해져 갔다. 또 나만 홀로 남겨 두고서...

가을 저녁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곳에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 왔다. 그 바람 속으로 날아 갔으면... 삶의 미련, 아쉬움, 기쁨, 희망, 사랑마저 날개 짓에 훨훨 털어내고 태양을 따라 석양빛 쏟아지는 저 황홀한 노을 속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었다. 그 순간 커튼처럼 어둠자락 내리던 골목으로 정적을 깨우는 어느 집 가장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복숭아 한 상자 만원, 포도 한 박스 팔천 원, 떨이요, 떨이 아주 쌉니다.’

살아 있는 소리다. 살아 있어 힘차게 희망을 부르는 소리다.

어느 날 홀로 우연히 떠 온 세상!

이렇게 사람들 속에서 힘차게 어우렁, 더우렁 얽히고 섥혀 살다가 사랑하는 이도 두고, 그리움도 두고, 아끼고 소중했던 인연들 모두 놓아주고, 훨훨 빈 손 흔들며 홀연히 떠나가야 할 우리들의 인생길!

올 때도 고독했고, 떠날 때도 고독 한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빈 손들고 찾아 왔던 길, 빈손으로 떠나는 것이 당연 할 진대. 나는 왜 이리도 몸부림을 치고 있는가!

세상 모두 부질없는 허상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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