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표 정치부 차장

   
최근 신문에는 ‘서훈을 치탈한다’는 문장이 자주 오르내리는데 한자 단어가 모여서 이뤄진 ‘서훈 치탈’은 어느 구석을 봐도 낯설기만 하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서훈은 ‘훈장을 내린다’는 뜻의 [명사], [하다형 자동사]이고 치탈은 ‘벗겨서 빼앗음’이라는 뜻의 [명사], [하다형 타동사]다. 서훈 치탈은 쉽게 말해 ‘이미 내린 훈장을 다시 빼앗는다’는 말인데 ‘벗겨서’라는 의미가 추가된 것을 고려할 때 낚아채 듯 거칠게 빼앗는 우악스러운 장면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또한 불교에 ‘치탈도첩’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승려가 삼보에 대해 불경죄를 지었을 때 신분증인 도첩을 빼앗아 공권을 정지시키는 것으로, 치탈이란 단어의 무게를 실감케 한다. 그런데 최근 서훈 치탈이란 말이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할 친일파 명단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오늘 목놓아 우노라’며 을사조약에 비분강개해 사설을 썼던 언론인 위암 장지연의 친일행적이 드러나자 경남의 언론단체가 장지연의 서훈을 치탈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나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29년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으로 훈장을 받았던 장재성씨 등의 서훈이 1962년 당시 5.1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정권에 의해 치탈된 것도 함께 여론의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서훈 치탈을 검토하고 있다는 기사는 최근 톱뉴스의 반열에 올랐다. 개정된 상훈법이 11월5일 발효되면 두 전직 대통령의 서훈 치탈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행정자치부는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대상에 12.12 쿠데타와 5.17 비상계엄 확대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최종 조사결과가 나온 뒤에 결정하겠다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두 전직 대통령이 받은 훈장은 각각 10개씩으로 모든 훈포장을 박탈해야 할지 아니면 5.18과 관련한 것만 박탈해야 할지도 고민거리라고 한다.

두 전직 대통령은 5.18과 관련해 각각 태극무공훈장과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국가안보와 충정훈련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주어진 훈장이라고 하지만 국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대가로 가슴에 단 훈장이니 떼어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훈장을 내리고 또 벗겨서 빼앗는 현실은 문득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학자 EH. Carr의 주장을 되새기게 만든다. 국가가 훈공을 인정한데 따른 최고의 상징물인 훈장이 오히려 시대정신의 변화에 따라 반동의 역사를 산 증거물로 남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리지역에서는 1980년 청주 삼일공원에 건립한 지역출신 3.1운동 민족대표 동상 가운데 정춘수의 동상이 그의 친일변절을 이유로 시민단체 회원들에 의해 강제 철거됐다. 훈장을 치탈한 것은 아니지만 일그러진 민족대표의 위상은 광목천에 묶여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벗겨서 빼앗는다’는 치탈에 준할만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최근 청원군의 한 교회에서 “일부 친일은 인정되지만 공적은 공적대로 평가돼야 한다”며 정춘수의 흉상을 건립했다. 평가받을 공적이야 눈을 씻고 찾아보면 없지야 않겠지만, 역사의 이름으로 떼어낸 훈장을 다시 달아주는 격이라 지켜보는 입맛이 쓰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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