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가슴에 품을 그리움 하나 있다면, 그래도 삶이 아름다웠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쟈스민의 향기가 첼로의 감미로운 선율 속으로 촉촉이 젖어드는 찻집! 계절이 저무는 가을도 아닌, 폭염이 아스팔트위를 난무 하는 이 여름날, 찻집창가에 걸린 노랑장미꽃이, 야윈 몸짓으로 옅은 바람결에 마른 기침소리를 뱉어 내고 있었다. 화려했던 꽃빛깔은 어느새 퇴색되어가고 싱그럽던 초록의 줄기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 창가에 걸린 마른 꽃을 바라보다가 문득, 며칠 전 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할머니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할머니를 보던 그 순간! 나는 내 젊은 날이 다 가기 전, 죽어도 여한 없을 사랑, 아니 내가슴이 시키는 사랑,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나의 뇌리를 스쳐갔던 것이다.

그 노인도 한때는 찬란했던 젊음이 있었을게다. 허나, 흐르는 시간을 누가 막을손가!

그 날, 태양이 부서져 내리는 아스팔트는 온통 열기로 후끈하여 숨쉬기조차 고역이었다. 그 길을 서툰 몸짓으로 힘겹게 걸어가던 억센 삶! 몸부림쳐가며 걸어가야 했던 그 길이 할머니에겐 어떤 의미인가! 허리가 기역자로 꼬부라져 바닥을 기듯이 끌고 가는 손수레엔 허술하게 쌓아 올린 종이 박스들이 금방이라도 허물어져 내릴 듯했다. 마치 지나가 버린 할머니의 세월 인 듯.

나는 가던 길 멈추고 길모퉁이를 돌아서던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할머니가 힘겹게 지나 간 그 아스팔트길 위에서 막대기처럼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흐르는 세월 따라 할머니의 모습으로 저만치 앞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온 세상이 소름끼치도록 쓸쓸하게 내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먼 훗날, 어쩌면, 세월 속에서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는, 아무도 모르는 아름다운 사랑 하나 가슴에 품고 있다면 그래도 한 세월 잘 살았구나 할 것 만 같다. 진정 기억 하고 싶은 사랑 하나쯤 가슴에 없다면 꼭 후회 할 것만 같았다.

삶 속에서 꼬부라들어 작아진 몸으로 이 광활한 천지를 아장 아장 걸어가는 할머니에게서 생의 절망과 슬픔을 보았다. 아니, 작은 기쁨하나도 건져 올렸다. 나는 아직 지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 아직은 내게, 죽어도 여한 없을 삶과 사랑을 그리워하고 열망할 시간들이 주어져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복 해야 할 일 아니던가! 아직 잃지 않은 시간들 앞에서 진실된 내 모습이고자 세상에서 얻어 입은 모든 규범의 옷을 벗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금껏 나는 진정한 내 모습으로 살아 왔던가?

문화, 그리고 주변의 모든 의식들 속에서 나는 거짓의 옷을 누덕누덕 기워 입고 있었다. 이젠 가면 같은 겉치레를 모두 벗어 버린 전라의 나 자신으로만 저 바람 속에 서있고 싶다. 타이타닉의 주연인 케이트 윈슬렛과 디카프리오, 그들은 단 24시간의 거짓 없는 사랑을 위해 평범한 삶들이 평생을 누리고도 남을 모든 것과 다 바꾸었다,

여름 밤바다 포효하는 파도처럼 죽어도 여한 없을, 그런 사랑 하나 쯤 가슴에 품기 전에 아직, 저 창가에 걸린 마른 꽃처럼 되어가긴 정말 싫어! 나는 가슴이 시키는대로 나를 찾아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 했다. 폭풍우 이는 가슴을 안고.

봄은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험한 바닷길을 건넜고 여름은 한 알의 씨앗을 품기위해 폭염 속으로 부서져 내리고 가을은 달콤한 사랑으로 온 대지를 가득 채우기 위해 저 바람 속을 달려왔으며 겨울은 진정한 우리의 삶을 침묵으로 지켜내느라 북풍한설을 꼿꼿하게 견뎌 낸다는 것을. 지천명의 고갯마루에 서서 이제사 절규하듯 토해내고 있다.

그러나 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풋과일이 익어 가듯, 한 때의 몸살처럼 내 삶의 여름이 가고, 가을 날! 맑고 투명한 바람에 잘 성숙된 과일처럼, 나도 세월따라 그 향과 깔의 깊이가 깊어갈 무렵이면 철없던 시절! 어느 해 여름밤을 떠올리며 세월 따라 머문 주름위로 고요한 호수의 파문처럼 잔잔한 미소하나쯤 띄우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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