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복구와 전재민 구호를 맡았던 충북지역 CAC의 사무실은 구 도청 민원실에 있었다.

대표자인 처장과 보건담당관, 후생담당관, 문교·공보·행정담당관 등으로 구성된 것이 CAC의 조직체계였다. 처장과 담당관들은 모두 외국인들이 맡았으며, 영어에 능통했던 한국인 10여명은 사무처 요원으로 일했다.

CAC가 철수한 뒤 사무실이 있던 건물은 1992년까지 도청 민원실로 쓰이다가 현재는 충북지방경찰청 구내식당과 사이버수사대, 행정동우회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1951년 5월26일 새벽 인민군 패잔병과 도내 좌익세력들이 청주 도청을 피습할 때 국민일보사(충청일보의 전신), 농업창고 등과 함께 습격대상에 포함돼 있었으나 날이 밝아 화를 면한다. 당시 좌익세력들은 도청을 피습해 건물 3동을 불태우고 탑동에 있던 청주형무소를 습격해 죄수들을 탈옥시켰다.

CAC사무실과 함께 주목을 받는 또 하나의 건물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33호로 지정된 탑동 양관이다. 일신여자중·고등학교 안에 있는 양관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주거용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1904년 부지를 매입해 1906년부터 1932년까지 모두 6동의 건물을 지었다.

청주에 이처럼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1904년 선교사 밀러(한국명 민노아)가 청주에 오면서부터. 기록에 따르면 양관 부지에서 기와와 벽돌을 굽기 위한 질 좋은 점토가 발견됐고 이를 채취해 벽돌을 굽는데 50여명 이상이 동원됐다고 한다.

이 건물 중 한 건물의 기초석은 카톨릭 순교자들이 투옥됐던 청주 감옥의 벽에서 가져다 사용했다고 한다. 또 당시 한국에서는 만들지 않았던 유리를 비롯해 스팀보일러, 벽난로, 수세식 변기 등이 설치됐다.

이처럼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서양식 건물인 탑동 양관은 수세식 변기 등 외국인들이 거주하는데 필수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어 미군정과 한국전쟁 당시에 외국인 숙소로 사용됐다. 미 군정청 요인들의 숙소로 사용된데 이어 CAC 요원들도 양관에 거주했던 것.

그래서 앞서 언급한 좌익세력들의 도청 피습 당시에도 양관 역시 피습대상에 포함됐으나 도청 피습에 많은 시간이 소요돼 성사되지 않았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