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대사관에서 일하다 유신에 반대해 망명한 이재현
국내 첫 진공관라디오 개발, 금성의 별로 떠오른 윤욱현

미국과 소련의 이념대립 속에서 한반도가 전쟁터로 변했던 6.25전쟁이 일어난 지 55년 이 흐른 지금,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미군과 유엔 원조기구에서 활약했던 두 충북인의 삶이 역사의 빛과 어둠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

한 사람은 주미대사관의 공보관으로 활약하던 1970년대 초반 유신체제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 망명의 길을 택했고, 다른 한 사람은 락희화학공업(현 LG전자의 전신)에서 국내 첫 진공관 라디오 개발에 성공해 금성통신과 금성계전 사장을 역임하며 성공한 기업인의 길을 걸었다.

미국 망명의 길을 택한 이재현씨는 현재 생사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LG그룹의 고문과 충북협회 회장으로 활약했던 윤욱현씨는 1985년 세상을 떠났다. 6.25라는 비극의 역사 속에서도 뛰어난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충북인의 삶을 추적해 본다.

   
▲ 유엔 군사원조처 요원들의 기념촬영. 사진속 동그라미 왼쪽이 이재현, 오른쪽이 윤욱현이다.
7월10일, 청주시민 대거 피난
1950년 6월25일에 발발한 6.25전쟁의 전운이 청주지역에 드리운 것은 7월 10일. 음성 감우재전투의 전승에도 불구하고 방어선이 뚫리면서 7월10일 대대적으로 피난을 권고하는 방송이 차량을 통해 청주지역에 전파된다. 이에 따라 충청북도 수뇌부를 비롯한 주민들의 대대적인 남행이 이날 시작된다.

당시 이광 충청북도지사와 도청 간부들도 옥천의 한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대기하다가 전세가 급속도로 악화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7월17일 옥천을 떠나 대구를 거쳐 부산시청 앞에 있는 부민관에 임시 사무소를 두고 피난 도민들에게 도민증을 발급했다고 한다.

피난갔던 청주시민들이 귀향길에 오른 것은 3개월만에 서울을 탈환한 9.28수복이 기점이 됐다. 한차례 전쟁의 포화가 휩쓸고 간 청주의 풍경은 남주동 일대가 비행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됐을 뿐 워낙 경황없이 후퇴가 이뤄진지라 교전의 상처는 깊지 않았다고 한다.

9.28 수복과 함께 청주에는 백선엽준장이 이끄는 국군 1사단과 미 25사단 27연대가 약 한 달여 동안 주둔하며 낙동강 전투에서 패퇴한 뒤 소백산을 따라 도주하던 인민군과 인민군 의용군 패잔병들을 소탕하거나 포로들을 귀순시키는 일을 맡게 된다.
소백산맥의 준령 가운데 하나인 이화령을 넘어오는 인민군 포로들을 일시 수용하는 시설이 괴산 연풍에 있었다는 것이 도정반세기(1996·충청리뷰 간)의 저자 이승우(75)씨의 증언이다.

이재현과 화딩중령의 재회
미군 25사단 27연대가 청주에 머물게 되면서 인연의 깊이를 실감케 된 사람들이 있는 있는데 바로 27연대 부연대장이었던 화딩(Fathing)중령과 27연대를 따라 평안북도 영변까지 진군하게 된 이재현(현 79세 추정)씨의 재회다.

화딩중령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미군정청 시절에 충북 군정청 광공국장으로 청주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고, 청주제2중학교(현재 청주기계공고 자리에 있었던 중·고등학교로 일본인들이 주로 다녔음)를 졸업한 이재현씨는 독학으로 터득한 뛰어난 영어실력 덕분에 충북 군정청에서 통역업무를 맡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던 미군 부대가 다시 이재현씨를 찾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소백산을 따라 도주하던 인민군 패잔병들을 소탕해 심문하고 귀순자를 가려내는 과정에는 이재현씨 외에도 영어에 능통한 지역인사들이 중용됐다. 도정반세기의 저자 이승우씨도 군속으로 미 27연대에서 일하면서 이재현씨와 인연을 맺는다. 이씨 등은 괴산 연풍을 오가며 인민군 포로에 대한 심사업무를 돕다가 10월 중순 대반격에 나선 미군을 따라 평양을 거쳐 평북 연변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승우씨는 이재현씨에 대해 “충북 영동 출신으로 제2중학교를 졸업한 이씨가 영어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그 시대에 능통하게 영어를 구사한 것은 철저한 자기 노력이 뒤따랐기 때문으로 본다”며 “당시에는 ‘I am a boy’만 할 줄 알아도 일단 데려다 쓰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미 27연대장이었던 마이케리스대령은 18년이 지난 1969년경 4성장군이 돼 주한 미8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유엔 민사원조처에서의 활약
9.28수복에서 1.4후퇴에 이르기까지 밀고 밀리는 접전이 이뤄지던 한국전쟁은 1951년 7월11일 정전회담이 시작되면서 교착상태에 빠진다.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 유엔의 구호사업이다. 유엔 민사원조처(UN Civil Assistance Corp 이하 CAC)가 구성돼 전쟁재해 복구와 전재민 구호에 나서는 것이다. 전쟁고아가 숱하게 발생하면서 필요하게 된 분유와 밀가루 등 먹거리를 비롯해 페니실린 등 응급의약품의 원조업무를 주도한 것이 바로CAC다.

충북의 경우에는 청주세무서 민원센터 맞은 편, 즉 도청 구 민원실 건물에 충북 주재 CAC사무실이 문을 열고 충북도청과 협력 하에 구호활동에 나서게 된다. 당시 충북 주재 CAC에는 처장인 미 육군의 나이트중령을 비롯해 프랑스인, 덴마크인 등이 당담관으로 파견되는데 청주도립병원 외과의사였던 신필수씨와 이재현씨 등 역시 영어에 능통했던 충북지역 인사들이 총동원된다.

CAC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은 대부분 이 활동을 발판 삼아 인생의 진로를 개척하게 되는데, 신필수씨는 충북 도민 가운데 미국 유학 제1호라는 기회를 잡아 3년 동안 재활의학을 전공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유신체제의 출범과 미국 망명
전쟁의 끝난 뒤 이재현씨는 정부 부처인 공보처로 스카웃된다. 역시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번역관련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이씨를 스카웃한 사람은 당시 공보처장인 갈흥기씨인데 갈씨는 1954년 11월27일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의 법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유명한 ‘사사오입론’을 주장해 이를 이틀만에 번복시킨 사람이다.

이씨는 공보처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공보처장 보좌관을 맡았다가 1970년대 초 워싱턴DC에 있는 주미대사관에서 공보관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이씨의 공직생활은 이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당시 국내에서는 1971년 3선개헌을 통해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2년 국회 및 정당 해산을 발표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다. 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토록 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해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신시대라 불리는 제4공화국이 시작된다.

이재현씨의 면모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치적 민주제도가 안착된 서구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이씨가 이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이씨는 유신체제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해 야인이 되면서 지인들의 시선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승우씨는 “이씨의 망명은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며 “철저하게 실력을 바탕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다 사라진 이씨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만나고픈 사람 중에 한 명”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국 망명 뒤의 이씨의 생활과 생사여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최초 국산라디오 생산을 주도한 윤욱현
이씨와 함께 CAC에서 활동을 하다 공보처로 발탁된 또 한 명의 충북인사가 있는데 훗날 금성계전 사장을 지낸 윤욱현(1924년생·1985년 작고)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청주고를 나와 역시 탁월한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CAC에서 일했던 윤씨는 갈흥기 공보처장의 추천으로 공보처에서 번역일을 맡기까지는 이재현씨와 같은 길을 걷는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윤씨는 1951년 미국에서 사출성형기를 들여와 우리나라에 ‘플라스틱시대’를 연 락희화학공업사에 기획부장으로 스카웃된다. 역시 영어실력이 발탁의 배경이 됐다.

윤씨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플라스틱에 이어 치약으로 기업을 키우던 락희의 구인회 회장이 사업분야를 넓히기 위해 견문이 넓었던 윤씨에게 새로운 사업에 대한 구상을 지시하게 되면서부터다.
평소 전축을 좋아해 전자기기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이와 관련해 외국서적을 탐독했던 윤씨는 구회장에게 국내 최초의 진공관 라디오 생산을 건의하게 되는데, 이는 화학관련 업종으로 성장해 온 락희에 있어서는 모험에 가까운 시도였다.

윤씨는 독일인 기술자인 헨케를 비롯해 국내 기술자들을 채용해 최초의 국산 진공관 라디오인 A-501을 생산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그 유명한 ‘금성사’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A-501은 외제 라디오에 밀려 금성사의 존폐위기를 불러오게 되는데, 농촌개혁을 외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농촌으로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추진하면서 기업을 살린 일약 효자 품목으로 부상하게 된다.

금성계전 사장으로, 충북협회장으로
LG그룹의 전신인 럭키금성에서 윤씨의 활약은 눈부셨다. 독일 최대의 전기·전자회사인 지멘스사와의 합자 추진 등 전세계를 무대로 한 사업에서 구인회 회장과 동행하며 최일선을 누빈 것이다.

윤씨의 장남인 성한씨는 선친에 대해 “치밀한 성격으로 외국기업과의 합자와 외자유치 등에서 공을 세워 구회장으로부터 큰 신임을 얻었던 것 같다”며 “그래서 계열사 사장과 그룹의 고문 등 중책을 맡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실제로 윤씨는 1970년대에 금성통신 사장을 거쳐 현재는 GS산전(구 LG산전)으로 이름이 바뀐 금성계전 사장, LG그룹 고문 등을 역임했다.

특히 윤씨는 지역발전을 위해서도 큰 공헌을 했는데 금성계전 사장으로 일하던 1980년, 청주산업단지에 금성계전 공장을 설립한 것이 그 예다. 금성계전을 시작으로 LG화학과 LG반도체(현 하이닉스반도체) 등 LG계열 5개사의 공장이 청주산단에 둥지를 트는데 이들 업체들이 고용창출과 조세납부 등으로 지역경제에 기여한 바는 산술적 계산이 어려울 정도다.

청주상공회소에서 일하다 정년 퇴임한 강태재씨는 윤욱현씨에 대해 “기업인으로서는 드물게 도량이 넓고 인자한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기억된다”며 “당시 럭키금성계열사의 청주산단 진출은 대기업으로부터 소외됐던 청주 지역경제에 희소식을 전해준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윤씨는 이같은 활약을 바탕으로, 1982년 재경 충북인들의 모임인 충북협회의 6대 회장으로 선임됐으나 1985년 6월 세상을 떠나면서 20년에 걸친 임광수회장 시대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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