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 선들바람에 만물은 돌아가야 할 때를 알고 나날이 수척해져 가는 초록의 숲은 어느새 석양빛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불혹을 넘긴 나이에 무엇을 알까마는 자연속에는 모든 사물의 이치와 보이지 않는 질서, 그리고 공평함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연에 조금만 가까이 있어도 고요와 평정이 찾아드는 것은.

꺾일 줄 모르는 폭염 속에, 도시도 길게 드러누운 오후 한낮, 더위를 피해 가까운 계곡이나 찾아갈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내 딴엔 주차를 잘한다고 한쪽으로 차를 세워 두었는데 한쪽은 벽면이요 다른 한쪽으론 00유치원이라는 이름표를 써 붙인 버스가 서있고 정면엔 사이드 브레이크 마저 채워놓은 승용차가 떠억 버티고 서 있었다. 사방이 막혀 버린 셈, 요즘은 앞 유리창 상부에 동호수가 적힌 아파트 로고를 붙여 놓는다. 표시된 그 동호수를 찾아 가 벨을 눌러보았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막연한 일이었다. 온몸은 땀으로 젖어 옷을 벗어 쥐어 짜면 물이 주르르 흘러 내릴것만 같았다.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고 덥기는 왜그리도 더웠던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더위에 지쳐있는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이나 하려는건가 정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갑자기 오기가 발동했다. 어디 끝까지 해보자는 식으로 결국은 아파트경비 아저씨의 도움을 빌려 말쑥하게 차려입은 한 여인이 나타났다. 나 또한 급한 성미인데다가 덥고 짜증이 나 있던터라 그 여인을 보는 순간 잡다한 언어들로 그 여인을 맞이했다. 거친 언어의 폭풍에 고요하던 아파트가 시끌벅적하니 결국 주민들의 구경거리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서로 꼴만 우습게 되고보니 창피했다. 얼른 더위 탓으로 돌리며 그 자리를 피해 대청댐 쪽으로 향했다.

산모퉁이 돌아 야트막한 능선을 타고 돌아서니 모시치마 단아한 모습의 여인들이 손사래 치며 다가왔다. 나는 홀린 듯 차에서 내렸다. 은사시 뽀얀 속살 사이로 석양빛마저 알씬거렸다. 저녁매미도 질투나 하듯, 어디선가 포르르 날아와 은사시의 가늘고 긴 허리 꽉 부여잡고 힘차게 울어 제친다. 계곡에 폭포수 쏟아져 내리 듯 퍼붓는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통쾌했다.

시원했다!

매미 소리는 마치 깊은 산속 석청인 양, 청량함으로 내안의 모든 갈증을 씻어 내렸다. 아니 온 몸에 묻혀 온 세상의 분진들마저 싹 쓸어버린 듯 정갈함을 느끼게 했다.

남을 위해 조금이라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서로에게 좋았을걸. 언제나 돌아서서 후회하는일이 다반사였다. 좀더 여유롭게 넉넉한 모습으로 그를 대했더라면 비록 무더운 한낮에 시원하게 쏟아져내리는 물줄기는 아니더라도 어쩌면 상대방의 마음속에 은은한 향기로 남아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언제나 내 입장만 내세우느라 안간힘을 쓰곤 한다.

여름의 끝자락을 부여잡은 산야에 석양빛이 가득 하다. 이렇게 자연은 삶에 미숙하고 어리석은 내게도 장엄하게 석양빛을 내려주는데 나는 언제나 내 안에 나 자신만을 가득 채워가고 있다.

또 하루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이 시간! 세상은 너무나 고요했다. 뒤틀림의 소리도, 삐걱 이는 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는다. 다만 바람에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만 이따금 구름에 실려 산 너머로 갔다. 문득 세월이 속절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순간순간 후회하고 돌아보지만 늘 말뿐이고 또 후회하기를 수없이 한다.

잠시 쉬고 있던 매미가 정적을 깼다.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매미소리는 예리한 칼날처럼 창공을 가로질렀다. 문헌에 의하면 매미는 수컷이 운다고 한다. 2~13년 정도 굼벵이로 땅속생활을 하다가 보기에 흉한 모습의 허물을 벗으면 성충이 되는데 그 것이 매미라고 한다.

초록이 짙은 여름 숲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선율이 바로 친구들을 부를 때나, 암컷을 부를 때 내는 소리라고 한다.그 소리가 무더운 여름을 얼마나 시원하게 해 주는지 모른다. 긴 어둠의 고통을 견뎌내고 종족 보존의 책임과 의무를 마칠 수 있는 여름과 가을에 걸쳐서 7~14일 정도 살다가 한 생을 마감한다는 매미의 생 앞에서 가슴이 아려왔다. 그토록 짧은 기간의 생을 위해 긴 어둠에서 밝음으로 거듭 태어나는 매미, 그 오랜 기간의 연단으로 제 몸 속을 텅 비워낸다. 비워 낸, 그 속에서 나오는 소리이기에 더욱 맑고 투명하리라.

그 소리는 한 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준다. 그 서늘한 소리가 있기에 여름이 시원하다. 매미가 맑고 투명한소리로 여름 한철 견디기 힘든 무더위를 식혀주듯, 나 역시 삶 속에서 내 주변 모든이들의 마음에 맑은 바람으로 다가서고 싶은데.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행해지는 자연의 질서는 사랑으로 움을 틔워내고 믿음으로 싹을 키우고, 서로를 배려하고 아껴주는 마음으로 줄기를, 또 희생과 봉사로 열매를 맺어 커다란 고목으로 자라 넓은 그늘도 드리우며 끊임없이 베푸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평화와 고요 속에서 형평성을 맞추어 간다. 그러나 그들을 요란떨며 거스르는 이들은 언제나 바로 나 자신이었다.

제짝 찾아 울던 매미는 어디로 갔을까?

석양빛이 은사시나무 가지 끝에서 오랜 시간 머물러 좀 더 기인 하루였으면 싶다. 허나, 그도 모두 내 욕심인가보다!

2001년 팔월의 마지막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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