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한반도는 붉은 물결로 출렁거렸다.
온 국민을 감격시켰던 신화는 날이 새면 새로운 줄거리를 이어가며 또 다시 국민들을 들뜨게 했다.
그런가하면 한일 월드컵은 우방국의 지도를 통째로 바꿔 놓았다.
교과서에서 배운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는 ‘히딩크의 나라’로 새롭게 다가왔고, 우리는 튤립보다 오렌지를 더욱 사랑한다는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됐다.
외신에서조차 낯설었던 터키의 경우 처음에는 ‘혈맹’이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설정이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역 땅에 젊은 피를 뿌린 그들이 먼저 우리를 혈맹이라 부르니 이내 핏줄이 이어진 양 가슴이 느꺼워졌고, 승패의 갈림길에서도 두 나라는 다정하기만 했다.
터키는 1950년 당시 수교도 맺지 않은 나라였던 한국의 비극적인 전쟁에 장병 14,936명을 파견했으며, 14군데 중요한 전투에 참여해 721명이 전사하는 등 모두 3,628명에 이르는 인명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나는 어느 날 지구본을 돌려 유럽과 아시아의 모서리에서 두 나라를 찾아내 조용히 마음에 담았다.
이에 반해 우리에게 8강 진출의 빗장을 열어준 이탈리아는 오히려 우리와 마음의 빗장을 닫게된 경우다.
우리는 무작정 거칠기만 한 그들의 ‘빗장수비’에 실망했고, 페루자 구단주의 편협한 빈정거림은 국민적인 공분으로 폭발했다.
이와 더불어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김동성의 금메달을 훔친 미국에 대한 반감은 월드컵 기간 내내 오랜 ‘혈맹’이라는 무조건반사에서 벗어나 줄곧 ‘반미감정’으로 치달았다.
미국전에서 동점골을 터뜨린 안정환과 우리 선수들의 ‘쇼트트랙 골 세레머니’는 그래서 잔디 위에서 펼쳐진 한판 ‘한풀이 퍼포먼스’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도 이 땅에 남아있는 나라...
그리하여 나머지 열다섯 혈맹의 존재를 희미하게 만든 미국의 그림자는 월드컵 기간 동안 생각지 않았던 또 다른 곳에 드리워졌다.
온 국민이 4강 진출에 들떴던 그 날, 경기도 양주에서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던 여중생 두 명이 도로를 지나던 미군 궤도차량에 치여 숨지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고와 관련해 의정부지청에 출두하기로 했던 미군 두 명은 신변위협과 초상권 침해 가능성을 이유로 들며 아직까지도 출두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가상상황’을 들먹이며 우리 검찰에 출두하지 않는 그들의 속셈이 무엇인지 그동안의 역사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미군이 낸 교통사고는 해마다 4백건이 넘어 전체 미군범죄의 60∼70%에 이르고 있지만 국내 법원의 재판권 행사 건수는 10건에도 못 미쳐 5%대를 밑돌고 있다.
또한 지난 80년대 말의 ‘윤금이’ 등 수많은 우리의 딸들이 그들의 성적 노리개가 되어 처참하게 죽어간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혈맹... 도대체 피로 진 빚은 얼마나 무거운 천형(天刑)이기에 이토록 반세기를 이어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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