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민의원, 오효진군수, 정진동, 김창규목사, 김재수 우진교통 대표 등

청주시와 청원군을 비롯해 진천, 보은, 옥천, 영동군을 관할하는 국가보훈처 청주보훈지청에 등록된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국가유공자는 15명, 유족은 1명이다.

이 가운데 광주 현지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은 광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계엄군에 의해 무차별 구타를 당해 정신질환 장해 1급 판정을 받은 장부용(45)씨와 광주시내 한 당구장에서 계엄군에 구타를 당해 장해 14급 판정을 받은 최도진(49)씨 등 2명이다.

유일한 유족은 학생운동을 하다 보안부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과 옥살이를 한 뒤 1981년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으나 경찰의 제지로 시신마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벽제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사라진 최종철씨의 유족들이다.

유공자로 등록된 사람 가운데에는 이른바 명사들이 상당수에 이르는데, 17대 국회에 입성한 노영민의원과 오효진청원군수도 그 중에 하나다. 노영민의원은 연세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이던 1977년 ‘연세대 구국선언서 사건’(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수감생활을 하다 1979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복학했지만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수배를 받고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 노의원은 이후 노동운동을 하다 복학이 이뤄져 1990년 입학한지 14년만에 졸업장을 받는다.

오효진군수는 1980년 5월20일부터 5월20일까지 MBC 취재기자로서 당시 수습기자이던 정동영의원과 함께 광주에 잠입해 광주의 참상을 취재, 송고했다가 유언비어 유포죄로 구속된다. 오군수는 법정에서 징역 3년형을 구형받았지만 군사법정이 도입한 ‘지휘관 감면제도’에 따른 감면결정으로 징역 2년에 형 집행면제를 선고받고 이례적으로 풀려난다.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헌병단갗를 작사해준 것이 감면요인으로 작용했는데, 당시 감면을 심사한 지휘관은 아이러니하게도 노태우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다.

오군수는 통신이 두절된 상황에서 ‘철도전화’를 이용해 리포트를 송고하는 등 기지를 발휘했지만 기사는 보도제한으로 방영되지 못했고 복사본으로 나돌다가 2002년 MBC 특집방송을 통해 22년만에 전파를 타게 된다.

그런가 하면 김창규목사(51)와 도시산업선교회 조순형전도사(57) 등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1980년 6월 김준태시인이 광주의 참상을 노래한 장시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등사해 유인물을 만든 뒤 배포하다 어느 시민의 신고로 군경합동수사대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대전교도소에서 40여일간 수감생활을 했다.

김 목사와 조 전도사는 고문후유증으로 각각 장해 10급과 장해 12급 판정을 받았다.
전남대에서 만든 ‘광주백서’와 김준태시인의 시를 우편으로 전달받았던 농민운동가 이유근(58)씨도 공범으로 몰려 함께 고초를 겪었다.

청주지역 민중운동의 대부 격인 정진동 도시산업선교회 목사도 전두환 퇴진운동을 벌인 대가로 옥고를 치러 유공자로 등록됐다. 정목사는 장해 11급 판정을 받았다.
나머지는 대부분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된 사람들인데 대표적인 경우가 충북대 78학번으로 각종 시위를 주도하다가 5월 비상계엄령과 함께 검거돼 보안부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수감생활을 한 김재수(46) 우진교통 대표다.

김씨는 민주노총 사무처장으로서 지난 1월 파업 끝에 노동자들의 자주관리회사로 문을 연 우진교통의 대표를 맡고 있다. 김씨는 2001년 유공자로 등록되면서 받은 보상금 2000만원을 도종환시인 등 지역인사들에게 기탁해 장학회설립의 주춧돌을 놓기도 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