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면 눈물이 먼저 나는 이름이 있다. 창밖으로 소리 없이 비가 내리거나 우연히 쳐다본 밤하늘에 달이 휘영청 떠 있을 때, 그리고 홀로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서성일때 얼핏 돌아보면 그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이렇듯 그리움이 깊어지면 나를 부르는 산의 손짓과 음성이 향수처럼 몰려오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서고는 한다.

일찍 출발하는 차를 타기위해 새벽잠을 설치고 아침도 거른 채 차에 오르니 설레임보다 피로가 먼저 몰려온다. 아마도 그것은 반복되던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내 시간으로 쓸 수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은 새싹 돋는 소리로 수런거리고 영취산 가는 길목에는 동백꽃이 속절없이 툭툭 떨어져 처연하게 소멸되어가고 있다. 한 겨울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당하게 피어있던 동백꽃, 나는 한때 저토록 아름답고 붉게 타오르는 사랑을 꿈꾼 적이 있었기에 떨어진 꽃송이가 너무도 애달파 상념만 깊어진 채 목적지에 도착했다.

산 아래 서서 사월의 명지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푸른 하늘 가까이 뻗어 나간 산맥을 바라본다. 여수 사람들이 영취산을 남한 최고의 진달래 산이라고 말하듯 산등성은 새색시의 홍조처럼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온통 진달래꽃의 향연이다. 오르면 오를수록 산과 들판과 아련히 보이는 바다가 절묘하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 연분홍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애잔하게 보이는 꽃잎 깊은 곳 에서는 분홍의 안개가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것 같아 경이롭다.

그리운 듯 피어있는 진달래꽃은 화려하지만 먹을 수 없는 철쭉에 비해 아무데서나 허기를 달래주고 손님상에 오르는 화전으로, 빛깔고운 술로 또는 약초로 요긴하게 쓰이는 참꽃이다. 두견새가 처연하게 울어댈 즈음이면 진달래가 피기 시작해 두견화라고도 불리는 꽃 앞에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긴 겨울을 인내하다 누가 가꾸지 않아도 스스로 꽃을 피워낸 여리디 여린 꽃잎은 저토록 섬세하고 고운 빛깔을 지닌 채 누구를 위해 만개하는 것일까, 저 아름다움을 어떻게 견디며 꽃잎 뚝뚝 떨어진 자리에 열매하나 맺지 못하고 파란 잎들만 무심히 싹을 틔울 터이니 누군가 꽃을 보면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주고 싶은 사랑만 지닌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나는 애련한 마음으로 그 곁을 스쳐간 바람의 향기를 맡고, 진달래나무에 철따라 내리던 빗소리를 듣고 꽃의 삶을 드려다 보다 홀연히 나의 삶을 뒤돌아본다.

존재하는 동안 계절의 순환 속에서 봄이 되면 꽃을 피워 자신의 아름다움을 나눠주며 긴 목에 부끄러운 얼굴로 사람들을 맞아주는 진달래 꽃 앞에 마주 서 있는 내 모습은 어떠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차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을 모르며 투정하고 조바심하다 스스로 상처받고 아파한다.

서로의 가슴에 다른 꽃이 피고 다른 별이 뜨며 꿈이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 되길 바라는 허망한 욕심이 순수한 꽃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상대가 누구든 사랑은 끝이 없는 무한욕망이 빚어내는 순간순간의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 사랑이 미완성이어서일까, 정녕 내 가슴 속에는 언제쯤이나 기꺼운 마음으로 내어줄 따뜻한 사랑이 꽃 필 것인가.

욕망과 집착과 기다림과 그리움의 자리에도 진달래꽃잎이 진 곳에 이파리가 무성하게 돋아나듯, 상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속깊이 소리를 들을 줄 알며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 진정 귀 기울일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있었으면 좋겠다.
발길 돌리는 저만치 환영처럼 서있는 그리운 이, 환하게 웃으며 손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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