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단양에서 경상도 영주로 통하는 큰길인 죽령은 소백산과 도솔봉 사이에 개설된 아주 오래된 길이다. 신라가 북방으로의 진출을 위해 죽령길을 개척하게 되었는데 아달라이사금 5년(158) 3월 죽죽이에 의하여 죽령길이 개통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죽령이라 부르게 되었으니 연륜이 1800년이나 넘은 셈이다.
이런 요충지에 자리잡은 죽령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둘레는 461.5m로 비교적 작은 산성이다. 내성은 석축으로 안쪽 높이는 11∼40㎝, 바깥쪽높이는 1.5∼14m이며 너비는 65∼80㎝이다. 외성은 토축으로 자연적인 지형을 깎아 바깥쪽은 험하게 안쪽은 평평하게 축성하여 바깥쪽높이는 18∼32m에 이르고, 안쪽은 1.2∼5m로 성의 기초부분을 보면 다져쌓기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죽령고갯길(현재 5번국도)에서 북쪽으로 연화봉쪽 능선 150여m는 한국전쟁 때 훼손되어 옛 흔적조차 사라져버렸고, 북편능선을 따라 비교적 큰 기단석이 일렬로 이어져 있으며 돌 위에는 아직도 많은 흙들이 쌓여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토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아 있는 기단석의 정면은 영주쪽을 향하고 있으며 내탁법을 이용하여 성을 쌓았기 때문에 동쪽은 상당히 높으나 서편은 산에 묻혀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관원이 도둑잡을 방법을 물으니 자신이 도둑소굴로 들어가 동태를 살펴서 알려줄테니 군졸들을 죽령고개 일대에 숨겨두었다가 “다자구야, 다자구야!”하고 소리를 치거든 급히 잡으러 오고, “들자구야, 들자구야.”하면 도둑이 잠들지 않고 있는 것이니 숨어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두목의 생일을 맞아 실컷 술을 마신 도둑들이 모두 곯아떨어지자 할머니가 “다자구야! 다자구야!”를 외치자 숨어 있던 관군이 달려나가 모두 잡아버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찾을 길이 없었다. 사람들은 다자구야 할미가 죽어서 죽령산신이 되었다고 믿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는데 다른 제사들이 모두 밤에 이루어지는데 비해 죽령산신제는 대낮에 행해지며 그 대상이 일반적인 산신령이 아니라 여성신이라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다자구야 할미를 모시고 있는 죽령산신당은 지방민속자료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도 용부원리 마을의 부락제로 이어지고 있다
3. 고려 공민왕과 지명에 얽힌 전설˝여기가 궁궐터이옵니다˝ 독락산성 주변에는 지명과 관련하여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려말 말 도락산 절골에는 짚신을 팔아 사는 할아버지 내외가 살고 있었다. 산아래 마을에서는 할아버지 이인(신기하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 불렀는데, 마음이 내키는 사람이나 기분이 좋을 때 부탁하면 명당자리나 집터를 잡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던 어느 날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이 어지러운 정국을 피해 미복(지위가 높은 사람이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입는 수수한 옷)차림으로 도락산 근처를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짚신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쉬어갈 것을 청했다. 할아버지는 서둘러 안으로 모시고는 할머니에게 귀한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해야 하니 산아래 박 서방네 집에 가서 쌀 한말을 꾸어오라고 했다. 하지만 한참 후 할머니는 빈손으로 돌아와 거절당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섭섭함을 토로하니 할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 사람 벼 50섬 할 좋은 집터를 잡아주었는데 쌀 한말도 거절하는구만. 그릇이 그만하니 벼 50석 자리밖에 나지 않더라.” 했다. 이를 듣고있던 공민왕이 “풍수지리를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어째서 짚신만 삼으며 이런 산골에 살고 있소?” 하고 물었다. 이에 짚신 할아버지가 대답하기를 “비록 돈 없고 권세 없는 하찮은 집터이지만 궁궐이 될 터이옵니다. 오늘 밤 임금께서 하루를 유하고 가실테니 말씀입니다. ” 했다. 깜짝 놀란 공민왕이 결국 이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으니 초라한 집은 행궁이, 집터는 궁궐터가 된 셈이었다. 그후 사람들은 궁텃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궁기동·내궁기·외궁기라는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