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동국정운 영인본 북에 전달사례 있어

묘향산 직지가 1973년 영인본이라면 오히려 전달경로가 관심을 모으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남과 북이 상대방의 서지학적 자료를 입수하는 경로는 일본을 통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일본에서도 출판됐거나 수집된 책을 다시 사들이는 방식이다.

그러나 1973년 영인본은 대규모 출판이 아니고, 배포과정에서 프랑스와의 마찰도 있어 일본에까지 흘러들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래서 비공식이든 공식이든 정부를 통해 전달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달시기는 1970년대 중반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1972년 7.4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이 대화의 물꼬를 튼 이래 1977년까지 남북적십자 대표회담과 실무회담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 1980년대는 남북의 공식교류가 뜸했고 1987년부터는 직지의 칼라 영인본이 출간됐다는 점에서 굳이 흑백 영인본을 전했을리는 만무하다는 분석이다.

국보 동국정운 영인본 북에 전달사례 있어

여기에다 남북적십자 회담 과정에서 남한이 국보 서적의 영인본을 북에 전달한 사례가 있다는 점도 이 같은 추측을 뒷받침한다. 조선 세종대에 만든 한자음 표준서인 ‘동국정운’ 영인본 6권이 북측의 요청으로 북에 전달된 것이다.

동국정운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2권이 발견된 뒤 1972년 강원도 강릉에서 전질 6권이 모두 발견돼 각각 국보 제71호와 제142호로 지정됐는데, 조선시대 한자의 표준음을 규정한 책이라는 점에서 북한에서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동국정운 영인본 6권은 강릉본을 소장한 건국대학교 박물관이 1973년 4월에 출판했으며, 적십자회담 실무진에 의해 북에 전달됐다.

김영진교수는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영인본이 출판될 경우 남북이 상호 제공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며 “직지 영인본도 이런 경로를 거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해에 직지와 동국정운의 영인본이 출판됐고 두 서적 모두 같은 시기에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는 점이다. 특히 이 시기에 남북교류가 급물살을 탔다는 점에서도 직지 영인본이 정부 관계자의 손에 의해 휴전선을 넘었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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