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육영수여사 주도 제작, 1970년대 중반 전달했을 가능성 높아
청주시 정책은 ‘직지 세계화’, 사업은

정종택 충청대 학장이 북한의 묘향산 보현사에서 봤다고 주장한 직지심체요절은 사진판독 결과 1973년 고 육영수여사 주도로 발간한 직지의 첫 영인본일 가능성이 높아 ‘직지 소동’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나게 됐다.

이는 정종택학장이 찍어온 사진과 1973년부터 4차례에 걸쳐 발행된 직지 영인본을 대조한 결과에 따른 것으로, 종이의 색깔과 특정 글자의 번짐 등이 1973년 문화공보부 문화재 관리국에서 발간한 직지의 흑백 영인본과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간단한 사진판독만으로도 구별이 가능한 사실이 청주시의회 본회의에서까지 거론되는 촌극을 빚은 것이다. 언론도 취재 과정없이 한대수시장의 발표내용을 그대로 보도해 청주시의 장단에 춤을 춘 꼴이 되고 말았다.
묘향산 보현사 직지의 진위 여부와 영인본이 북에 전달된 과정을 추적해 봤다.

붓두껍 자국으로 미뤄 100% 영인본

한대수청주시장은 지난달 24일 열린 제238회 청주시의회 2차 본회의에서 ‘북한 보현사에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진 직지의 원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방북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이는 정종택 충청대 학장이 지난 2002년 5월28일부터 6월1일까지 남북 태권도교류 차원에서 북한을 방문했다가 묘향산 보현사에서 직지를 목격했다는 주장에 따른 것으로, 북한의 직지가 원본일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전문가와 함께 방북해 진위여부를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학장이 본 직지는 일단 직지의 간기가 나와있는 39페이지 등에 찍힌 붓두껍 무늬가 프랑스에 있는 원본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영인본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분석된다. 프랑스 원본의 붓두껍 자국이 직지 인쇄 당시에 찍힌 것이 아니라 후세에 직지를 소장했던 사람이 특정문구를 표시하기 위해 찍어둔 것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직지 원본에도 이 자국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학장이 찍어온 사진을 판독한 결과 ‘청주목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간기가 등장하는 39페이지와 38페이지에서 모두 5개의 붓두껍 자국이 확인됐는데, 프랑스 원본과 비교할 때 개수와 위치가 정확히 일치했다.

영인본조차 만들기도 어려웠던 직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는 1972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도서의 해’ 특별전시회에서 재불 서지학자인 박병선박사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구한말 주한 프랑스 공사인 꼴랭드 쁠랑시가 수집해 프랑스로 건너간 직지는 원본을 되찾는 것은 물론 영인본을 만드는 것조차 녹녹치 않았다.

직지의 첫 영인본 제작은 1972년 12월 박병선박사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사진판을 가져와 추진하게 됐는데, 1973년 고 육영수여사가 각별한 관심을 보여 문화공보부 문화재 관리국에서 제작을 맡도록 주선했다고 한다.

그러나 첫 영인본의 제작과 배포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영인본과 함께 발행한 해제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프랑스국립도서관이 3년에 걸쳐 연구한 내용이 반영되지 않은데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연구용으로 영인본 50권을 보내기로 한 영인허가 조건을 제대로 지키지 않자 프랑스 측이 배포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73년 영인본은 문화재 관리국 등 관계기관을 중심으로 배포된 귀한 책이 되고 말았다.

1986년 전두환 전 대통령 방불로 빗장 풀려

프랑스가 직지에 대한 경계의 빗장을 푼 것은 1986년 4월 전두환대통령이 프랑스를 국빈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엘리제궁에서 전대통령을 맞이한 당시 프랑스 미테랑대통령이 ‘직지’ 등 한국의 고인쇄문화를 거론하며 인사말을 건넨데 이어, 직지와 외규장각 도서를 열람토록 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1987년 12월 문화재 관리국에서 다시 영인본을 출간하게 되는데, 이 영인본은 한지에 흑백 상태로 인쇄한 1973년 영인본과 달리, 종이가 누렇게 변색된 직지 원본을 그대로 본 뜬 칼라 영인본이다.

한편 직지의 고향인 청주에서도 영인본이 발간됐는데, 흥덕사지 발굴을 주관한 청주대 박물관에서 1973년 영인본을 재영인한 영인본을 1986년 5월에 발간한 것이 그 시초다. 청주대 영인본은 영인본을 다시 복제해 인쇄상태가 불량하고 종이도 갱지를 사용하는 등 조잡하지만 흔치 않은 1973년 영인본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어 의미가 있다.

이어 1996년부터 청주시가 문화재 관리국의 영인본 필름을 빌려 칼라와 흑백 영인본을 각각 2차례 발행하면서 영인본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북한 직지는 1973년 영인본이 분명

그렇다면 묘향산 보현사의 직지는 어떤 영인본이 건너간 것일까? 청주고인쇄박물관 나경준학예연구사는 이에 대해 “1999년 11월 프랑스 출장 중에 직지원본과 1973년 영인본을 4시간에 걸쳐 열람한 결과에 비춰볼 때 1973년 문화재 관리국 영인본이거나 1985년 청주대 영인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정학장이 찍어온 사진 속의 직지는 색이 전혀 변색되지 않은 한지 원색을 띠고 있어, 분명히 변색이 됐을 또 다른 직지 원본이나 누렇게 변질된 상태를 그대로 영인한 1987년의 문화재 관리국의 칼라 영인본, 1996년 청주시의 칼라 영인본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확한 확인은 흥덕사 발굴 당시 청주대 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영진 전 청주대교수가 소장한 각종 영인본과 사진을 대조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1973년 영인본을 그대로 복제한 청주대 영인본과 정 학장의 사진을 확대경으로 판독해 비교한 결과 직지 간기가 있는 39페이지 4행의 첫 글자인 깨달을 ‘오’(悟)자와 권말제(卷末題)의 끝 부분인 ‘권하’(卷下) 등 3군데가 똑같이 번져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에 반해 1987년 영인본과 청주시의 영인본은 프랑스 원본과 마찬가지로 해당 글자에 번짐이 없다. 또한 책의 가장자리 부근도 먹이 번진 듯 지저분한데, 1987년 영인본과 청주시 영인본은 역시 상태가 양호하다.

김영진교수는 “글자의 번짐 등 인쇄상태로 볼때 1973년에 만든 흑백 영인본이 북한으로 건너간 것이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1973년 영인본과 해제본 등 그동안 발간된 영인본과 해제본을 모두 소장하고 있었으나 1973년 영인본은 1987년 전두환대통령의 충북 연두순시 때 청와대에 참고자료로 제출해 아쉽게도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북한 백과사전도 직지의 가치 소개

북한이 직지의 가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도 묘향산 직지의 원본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서지학에 대한 북한의 관심은 남한 못지 않아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는가 하면 팔만대장경 해제본을 2차례에 걸쳐 발간하기도 했다. 또 직지 영인본이 소장된 묘향산 보현사에는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1937년 인쇄본이 보관돼 있기도 하다.

직지의 존재와 가치는 북한의 학술서적에도 잘 나타나있는데, 1990년 12월 북한의 과학백과사전 종합출판사가 펴낸 ‘우리나라 중세과학기술사’는 직지를 ‘1377년 충청도 청주의 흥덕사에서 인쇄된 불교책’으로 소개하면서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주최로 1972년 프랑스의 빠리에서 열린 ‘책의 력사’ 종합전람회에서 이 ‘직지심경’이 전시되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고인쇄박물관 나경준 학예연구사는 “묘향산의 직지가 원본이라면 북한이 진작에 이를 문화재로 지정했을 것으로 본다”며 영인본 가능성에 힘을 실었다. 김영진교수도 “유홍준 현 문화재청장 등 그동안 남한의 여러 학자가 북한을 방문해 보현사 소장고를 둘러봤음에도 직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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