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권<1> - 단양군<1>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4,000여 리 백두대간!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달리던 대간의 큰 줄기가 방향을 바꿔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그곳에 소백산(小白山)이 있다. 예로부터 신령스러움으로 추앙을 받던 소백산은 온갖 설화들을 주저리주저리 품고 있는데, 조선시대의 이름난 실학자 남사고가 죽령을 넘어가다 소백산을 보며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며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 소백산 능선길 대한불교 천태종 총본산인 구인사(救仁寺)는 신령한 소백산이 있는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132-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소백산 제사봉에서 뻗어내려 기묘하게 솟아오른 구봉팔문(九峰八門)중 수리봉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칠봉, 왼쪽으로 삼봉 사이 골짜기를 가득하게 채우고 있다. ▲ 구봉팔문
풍수지리에 따르면 수리봉 아래 구인사가 자리한 이 지형은 구봉팔문의 중심으로 금으로 된 닭이 알을 품고있다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한가운데 연꽃 형상이라고 한다. 신단양에서 영춘 방향으로 33번 도로를 따라가다 향산리에서 595번 도로로 바꿔 백자리로 가거나, 남한강변을 따라 나있는 도로를 따라 영춘대교를 건너면 된다.



▲ 청동으로 만든 사천왕상1 여름이 막 끝난 초가을 구인사로 가는 길은 하늘도 강물도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구인사는 참 용한 절이유. 거기서 영험을 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니까유. 뭐든 한 가지만 발복하면 꼭 들어준다니까유.” 절로 오르는 길가에서 불전에 시주할 잡곡을 파는 주름 가득한 할머니는 구인사에 대한 자랑이 대단하다. ‘소백산구인사’라고 쓰여진 일주문(一柱門)이 보이고,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면 좁은 골짜기를 막아 선 천왕문(天王門)이 수문장처럼 우뚝하게 버티고 있다. 경내로 들어가는 모든 악귀들을 물리치는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은 규모를 갖추고 있는 절집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데, 특히 구인사의 천왕문에 있는 사천왕상은 청동으로 되어있는 것으로는 국내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다.구인사는 1945년에 개창하였으므로 연륜이 오래된 절집은 아니다. 하지만 구인사를 처음 본 사람들은 현대적인 콘크리트 건물로 된 이색적인 대가람의 엄청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산골짜기에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웅장한 건물들의 기세에 마치 궁궐에라도 들어온 느낌을 받는다. 경내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데, 그 중에서 5층으로 된 높이 33m, 넓이 900평의 대법당과, 135평의 목조대강당인 광명당, 30칸의 수도실인 판도암, 18칸의 특별강원인 설선당, 침식용의 향적당, 400평의 3층 건물인 총무원 청사, 60평의 천왕문과 거기에 안치된 국내최대의 청동사천왕상 등이 있다. ▲ 구인사 전경

수리봉 계곡에 있는 불사와 편의시설까지 합치면 약 50여동의 건물이 있으며,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원이 5만 6천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장독대에 정돈되어 있는 사람 몸통보다도 큰 수백 개의 장독과 2만 리터에 가까운 보일러실의 기름저장용량을 보더라도 이 절의 규모와 내왕하는 신도들의 수효를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매일처럼 수십 대씩의 관광버스가 부산 경남 서울 등지에서 오고, 일천여 명이 넘는 신도가 기거하며 기도를 드리고 있으나 워낙 거대한 건물들 속에 묻혀 경내를 다니는 유동인구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구인사의 신도수는 현재 2백만 명을 넘어 단일 사찰로는 국내 최대의 신도수를 가지고 있다.

▲ 대각국사의천 진영 구인사는 천태종파이다. 천태종은 중국 수나라 때 지의(천태지자;538∼597)선사가 처음으로 연 교파이다. 천태종이라는 명칭은 지의선사가 중국의 절강성에 있는 천태산에서 교화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나라에 천태종이 처음 들어온 것은 581년 신라의 연광대사가 지의선사의 문하에 들어가 법화묘관(法華妙觀)을 깨닫고 돌아와 천태교학을 가르쳤고, 법융, 이응, 순영의 세 선사도 당나라에 건너가 천태종의 제8조 좌계현랑으로부터 천태교법을 얻고 신라에 돌아와 교법을 전하는데 힘썼다. 그리고 961년, 고려 광종 12년에 오월왕의 요청으로 체관법사를 파견 천태종불교를 역수출, 침체되었던 중국 천태종 부흥에 큰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에 의해 천태종이 교세를 펼치게 되었다. 의천은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의 넷째 왕자 후로, 왕자 중 한 명을 출가시켜야 하는 국법에 따라 11세에 자원하여 출가하였다. 1085년 송나라로 유학하여 당시 화엄의 대가였던 유성법사와 교우하며 화엄과 천태에 관해 의견을 주고 받았다. 또 자변대사와 원소율사를 만나 천태, 정토교학을 담론하고, 인도 승려 천길상을 만나 인도에 대한 사정과 문을 배웠다. 의천은 귀국하기 전 천태산 지의의 탑을 찾아가 고려에 돌아가 천태교학을 널리 펼칠 것을 맹세했다. 1086년 5월, 14개월만에 불경서를 3천여 권 가지고 귀국한 후 흥국사에 머물며 교장도감을 두어 4,740여 권의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다.1097년 개경 국청사가 완성되자 의천은 국청사를 중심으로 6대 본산을 두고 천태교학을 강의하며 교학을 널리 펼쳤다. 이후 천태종의 문도들이 전라남도 강진의 만덕산 백련사를 중심으로 번성하였으나,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불교억압정책으로 다른 종파와 마찬가지로 천태종 또한 쇠퇴하게 되었다.긴 세월 속에 묻혀 있던 천태종이 다시 세상의 밝은 빛으로 중생들을 제도하게 된 것은 1967년 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祖師)에 의해 소백산 구인사에서 큰 불사로 다시 일어나 번창하고 있다. 조사라는 말은 한 종파를 세워서 그 종지를 열어 주장한 사람을 높여서 부르는 말인데 구인사를 처음 세운 상월원각대조사는 속명이 박준동 스님으로 강원도 삼척이 고향이다. 2대 독자였던 상월원각대조사를 잉태할 때 어머니 김씨는 하늘에서 광채를 띠는 큰별을 가슴에 안기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 향토사학자 윤수경 씨. 단양 지역 향토사의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15세에 출가하여 전국을 만행하며 도를 닦던 조사가 1942년 중국 티벳 등지에서 곤륜산, 오대산의 문수도량과 아미산의 보현성지 등을 순례하고 해방 직전 귀국하여 중생의 귀의처가 될 승지를 찾다 1945년 소백산에서 구봉팔문의 연화지를 찾아 천태지관(天台止觀)의 터전을 닦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이곳에서 풀로 지은 암자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면서 머지않아 이 골짜기에 부처님의 은혜가 충만할 것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대조사는 신도들의 신상길흉사를 점지하여 생불소리를 들었다는데, 그 때문에 샤머니즘에 가까운 이색종교로 이단시되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천태종 대각불교포교원으로 종교단체 등록을 하였다가, 1967년 1월 24일 한국 불교 18개 종단 중의 하나인 대한불교 천태종을 인가받아 구인사로 등록 후 짧은 기간 동안 크게 발전하여 오늘날 전국 굴지의 사찰이 되었다. 구인사는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대법당에는 3체불을 모시고 있으며, 그 이름 속에는 구제중생(救濟衆生)의 뜻이 담겨져 있다.

대각국사 의천을 종조로 삼고 있으며, 근본경전은 ‘법화경(法華經)’이다. 법화경은 부처님의 지혜를 열어보여 모든 중생들을 깨닫게 하고 부처님의 지혜에 들게 함을 목적으로 편찬된 경이다. 법화경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은 대승불교가 만들어질 무렵 소승불교의 학문적 추구와 전문화로 일반대중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지 못하자 신앙심이 깊은 보살들이 중심이 되어 부처님의 사리탑 신앙을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며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일불승(一佛乘) 사상과 구원성불(久遠成佛)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전을 편찬하게 된 것이다. 구인사에서 주창하는 종지는 법화사상인 회삼귀일(會三歸一), 일심삼관(一心三觀), 원융불이(圓融不二)의 가르침과 대각국사의 호국이념이다. 참선과 염불로써 개인의 인격완성, 국민사상의 통일, 사회의 불교적 정화를 이룩하여 국가사회에 공헌함을 실천목표로 한다.

▲ 한국 천태종 중창조 상월 조사 진영 구인사는 창건주 상월원각대조사가 애국생활과 대중불교를 기치로 현실생활에서 부처님의 참뜻을 찾는 새 신앙운동을 전개하며 세운 천태종 중흥 3대 지표인 애국불교·대중불교·생활불교의 참뜻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종래의 염불 중심의 의례종교를 탈피하고 부처의 자비심이 곧 애국애족이며, 애국에 바탕을 두고 대중불교를 지향하며, 생활불교를 표방하여 승려들이 절간에 앉아 수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자를 자급자족하기 위해 스님들도 낮에는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하고 밤에 수도하는 주경야선(晝耕夜禪)을 실천하여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개척하고 구도자의 자세로 도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는 중생들을 계도하여 인간의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도 종교의 사명이라고 역설했다. 이런 상월원각대조사의 가르침은 경내를 둘러보며 “게으른 자여 성불을 바라는갚 “이 세상에 내 것이 디 있나, 사용하다 버리고 갈 뿐이다” 라고 적힌 팻말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 구인사 진신사리석탑
불제자로서 살생은 할 수는 없지만, 구인사 스님들은 육식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영물로 여겨지는 개, 닭, 꿩, 노루, 뱀, 고등어, 잉어, 메기 등 비린내가 나거나, 제사에 쓰이지 않는 고기를 제외하고는 공양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 그 배경은 석가모니가 밥을 얻어먹을 때 육식도 함께 했다는 설에 의미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주경야선하는 스님들의 체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불도를 닦은 사람을 그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긴 수행계급을 법계라 하는데, 구인사 스님들은 법계를 모두 7등급으로 나누고 3년 동안 수습을 통해 기초의식과 교리를 통달하면 7급을 받을 수 있고, 5년마다 법계고시를 치뤄야 승계할 수 있다. 구인사 종단조직을 살펴보면 종정을 정점으로 그 아래에 총무원, 교화원, 감사원과 의결기구인 종의회가 있으며, 상설기구로 원로원과 금강학원, 교리연구원 및 고시위원회 등을 두고 있다.

역대 종정으로는 초대 상월원각대조사, 2대 남대충 스님에 이어 현재는 3대 김도용 스님이 종정을 맡고 있다. 신도조직은 신흥종단 중 가장 방대하며, 매월 각 지방을 순회하며 지부 단위의 정기법회를 열고있는 포교방법과 주경야선으로 운영재원을 자급 충당하는 점이 특별하다.

▲ 구인사 전경 구인사의 연중 큰 행사로는 음력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과 구인사 창건일인 단오절과 동짓달 동지불공일을 제일로 꼽는다. 석탄일이나 창건일이야 당연한 행사이지만, 특히 구인사에서 동지불공일을 중하게 여기는 것은 동짓날은 밤이 가장 길었다가 낮이 길어지는 날로 모든 우주의 흐름이 새로 시작되고, 자연의 생명체가 새로 태동하는 시점으로 다음 해의 소원성취와 운수대통을 위해 정성을 다해 불공을 드린다는 것이다. 석가탄신일을 비롯한 구인사의 행사시에는 수백 대의 버스와 승용차들이 몰려들어 교통이 차단될 정도라고 하니 가히 절의 세를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상월원각대조사는 생활불교를 실천하며 도를 깨친 살아있는 부처였다. 대조사는 “하나의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면 어느 곳에서든 연화(蓮華), 즉 극락의 문이 열릴 것이다. ”라는 법어와 “실상(實相)은 무상(無想)이요, 묘법(妙法)은 무생(無生)이며 연화(蓮華)는 무색(無色)이다. 무상(無想)으로 체(責)를 삼고 무생(無生)에 안주(安住)하여 무색(無色)으로 생활하면 그것이 곧 무상보제(無上菩提)요 무애해탈(無碍解脫)이며 무한생명(無限生命)의 자체구현(自責具現)이다. 일심(一心)이 상청(常淸)하면 처처(處處)에 연화개(蓮華開)이다”라는 법어를 남겼다. 경내에는 대조사의 뜻을 새기기 위해 세운 법어비가 자연석에 새겨져 있다. 상월원각대조사가 64세로 열반에 든 후 1978년에 세운 상월조사중창비문에 보면 대조사가 열반하자 소백산 동쪽 하늘에는 오색구름이 한동안 떠있었고 이상한 향기가 돌았다고 한다. ▲ 조사전 앞의 금강신장상. 금방이라도 잡귀를 내리칠 기세다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대조사전(大祖師殿)을 꼭 보고 가셔야지유.” 대조사의 법어비 앞에서 뜻몰라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그냥 내려가려는 품새로 비쳤는지 지나던 보살할미가 말을 했다. 건물 밑 계단을 지나고, 건물 사이로 난 비탈길을 걸어올라 산허리를 돌아들자 날아갈 듯 서 있는 화려한 건물이 눈을 부시게 했다. 대조사전이었다. 구인사가 비록 일천한 연륜으로 경내에는 규모만 거대할 뿐 후세에 길이 남을만한 유물 유적은 없다. 하지만 최근에 완공한 대조사전은 규모면에서나 예술적인 측면으로나 최고의 걸작품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조사는 한 종파를 세우고 그 종지를 열어 주장한 사람을 높여서 부르는 말로 후인들의 귀의처가 될 정도로 높이 받들어 숭배한다. 구인사의 대조사전에는 당연히 상월원각대조사를 모시고 있다. 상월원각대조사가 천태종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중국의 지의(일명, 천태지자)선사와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義天)으로 이어지는 법화수행(法華修行)에 의한 천태법맥을 계승하여 조선시대 이후 민간불교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며 거의 멸실된 천태종을 다시 재건하여 천태종의 오늘을 있게 하였다.

   
▲ 구인사일주문
천태법화의 가르침은 상월원각대조사가 주창한 새 불교운동으로 발전하여 애국불교, 생활불교, 대중불교의 종단 삼대지표가 되었다. 이처럼 새 불교운동을 펼친 상월원각대조사의 존상을 모시기 위해 1985년 7월 종무회의에서 세계적인 문화재가 될 대조사전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3차에 걸친 설계를 마치고 1992년 5월 28일 남대충 대종사와 2만 여명의 사부대중이 모인 가운데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9년이란 긴 시간 끝에 2000년 11월 5일 낙성식을 가졌다. 적멸궁 아래 지어진 대조사전은 국내 목조건물로는 최고로 높은 27m의 3층 다포집으로 황금기와를 얹은 목조건물이며, 목재는 태백산 적송으로 300년 이상 된 목재로만 50만재를 사용하였다.

총 167평으로 1, 2층은 외 7포, 내 11포, 3층은 시각적으로 더 웅장하게 보이기 위해 외 9포, 내 13포의 구조로 되어있다. 대조사전 내부에는 국내에서는 가장 큰 8자 3치의 상월원각대조사의 금동존상을 특수 괴목으로 만든 좌대 위에 봉안했으며, 탱화는 대조사전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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