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권<1> - 단양군

▲ 지도 신단양에서 고수대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33번 국가지원지방도를 따라가면 가곡과 향산을 지나게 되고 곧바로 군간나루가 있던 자리에 시멘트로 만들어진 군간교가 나타난다. 군간교를 건너면 33번 도로와 522번 지방도가 만나게 되는데 온달산성은 우회전하여 영춘 쪽으로 남한강을 따라가는 522번 도로를 타야한다. 이 길을 따라 가린여울·밤수거리를 돌아들면 영춘교가 나오는데 이 다리에서 522번 도로는 595번 도로와 접경을 이루게 된다. 595번 도로는 영춘과 구인사 방향으로 갈라지는데 온달산성은 영춘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여 구인사쪽으로 가야 한다. 남천교를 건너 곧바로 온달관광지가 나온다. 온달산성은 이 단지 안에 있다. 신단양에서 온달산성이 있는 영춘으로 가는 연변에는 가을 정취가 아주 좋다. 붉은 아치의 고수대교를 건너자마자 시작된 산자락으로 꼬불꼬불하게 나있는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갑작스레 눈앞을 막아서는 절벽들, 차창을 통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시퍼런 강물은 온갖 불길한 예감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드높은 하늘, 파란 하늘을 찌를 듯 맞닿아 있는 산, 그 산을 구비구비 돌아들어선 영춘 땅은 동서남북 어느 사위를 둘러보아도 온통 산뿐이다. ▲ 온달산성에는 영춘 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춘면은 단양군의 동북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고구려시대에는 을아단현, 신라 신문왕 때에는 자춘이라 불리었다. 조선 세조 3년(1457)에 이르러 영춘이란 지명으로 명명되었으며 1914년 단양군에 편입되었다. 동북으로 강원도 영월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에는 태화산(1,027m)이 솟아있다.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영춘대교를 건너며 문득 눈을 들어 소백산 연화봉 쪽을 바라보니 강가 깎아지른 절벽 위로 머리에 테를 두른 듯한 성벽 자락이 뚜렷하게 보였다. 바로 고구려 장수 온달장군이 쌓았다는 온달산성이다. 온달산성은 단양군 영춘면 하리와 백자리 사이의 해발 427m 성산 정상에 있으며, 1979년 사적 264호로 지정된 삼국시대의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신라의 북진정책이 맞물려 영토확장 경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두 나라가 첨예하게 대치하던 전초기지로서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이 신라로부터 이 성을 탈환하기 위해 왔다가 전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옛 석성(石城)이다. 온달산성으로 오르기 위해 매표소를 통과하니 넓직한 광장에는 온갖 깃발들이 휘날리고,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이며 모처럼 적막하던 산골에도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 온달축제의 일환으로 펼쳐진 허수아비 행렬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온달문화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축제마당을 가로지르자마자 곧바로 시작된 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코가 닿을 듯 가파르다고 해서 붙여진 ‘코재’나 숨이 넘어갈 듯 힘겨워 붙여진 ‘할딱재’처럼 계속되는 오르막길이다. 30여분 땀을 흘리며 숲길을 걸어 겨우 성벽에 다다르니 손바닥만한 하늘이 빠꼼하게 올려다 보인다. 사다리를 타고 동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문이나 성곽으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내밀어 쌓은 치성에 오르니 한순간 가슴이 뚫리도록 사방이 시원하게 트였다. 동쪽으로는 영월·평창·정선·강릉지역으로, 서쪽으로는 죽령·점촌, 남쪽으로는 영주·순흥, 북쪽으로는 제천·원주·서울로 가는 사통오달의 길목에다 서울로 가는 빠른 물길까지 접하고 있는 천혜의 군사 요충지로서 삼국 중 어떤 나라도 온달산성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멀리 태화산 밑으로 영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영월에서 내려오는 남한강이 영춘을 끼고 돌며 온달산성 밑 절벽을 휘돌아 군간나루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한 폭의 잘 그려진 풍경화를 보는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담하고 예쁜 온달산성. 영춘을 돌아 흐르는 남한강 남쪽 성산 꼭대기를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벽의 안팎을 돌로 쌓아올린 내외협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레는 683m, 동쪽 성벽높이는 6m, 북쪽과 남쪽이 7∼8m, 서쪽은 10m에 이른다. 성의 너비는 3∼4m이다. 성벽은 대략 길이 70㎝, 너비 40㎝, 두께 5㎝ 크기의 얄팍한 네모꼴 돌로 수평쌓기를 하였으며 수평을 유지하기 위하여 쐐기돌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수년 전만 해도 서북쪽 남한강에 접한 절벽에 축성된 성벽이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잘 복원되어 성을 둘러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 성 안쪽에서 본 동문.
성은 동·남·북쪽 세 곳에 문 자리가 남아 있으며 동문지는 문구부의 너비가 7.3m로 바깥쪽은 수직 절단면으로 되어있으며, 북문지는 너비가 6m 정도로 북동쪽 모서리를 곡성으로 처리하였다.

온달산성의 모든 문터는 바깥쪽에서 보면 입면이 요(凹)형을 이루며 성안과 바깥의 높이가 차이가 있는데 이런 형태의 문은 사다리나 현문(懸門:아래 위로 여닫게 되어 있는 문)이 설치되어 출입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온달산성에는 성안의 불필요한 물을 바깥으로 흘러나갈 수 있게 만든 수구가 있다. 북쪽 성벽 바깥에 설치된 이 수구는 지면에서 1.1m여의 높이에 배수구가 있으며 아랫너비 0.35m, 윗너비 0.25m, 높이 0.65m의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수문의 형태는 충주산성(일명 남산성)이나 보은의 삼년산성 수구에서도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지역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촌로의 말을 빌면 ‘성안에는 큰 우물이 있었으나 사람들이 농토로 개간하며 메워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매몰된 자리에서 물이 조금 나올 정도이며, 개간했던 농토는 묵정밭이 되어버렸고 그 자리에는 온갖 잡목들이 우거져 있다. 북문 입구 안쪽에는 어른 머리 크기의 둥글둥글한 강돌이 무더기를 이루며 쌓여있는데 이는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살상하기 위해 사용하던 무기로 보인다.

성안 곳곳에서는 신라나 백제의 토기 조각과 혹간 고구려 계통의 토기가 발견되는데 이는 애초에 고구려에서 쌓은 산성이었으나 남한강을 북동쪽에 두고 있는 강변의 지세나 성의 방어정면, 성벽의 배치방향과 높이, 성문의 위치 등으로 볼 때 6세기 중엽 신라가 점령한 후 북쪽의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에서 성을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산성에서 제일 높은 서쪽 치성을 돌아 남문지에 이르러 남천계곡으로 눈을 돌리니 동서로 길게 펼쳐진 소백산을 병풍 삼아 불쑥불쑥 솟은 기이한 봉우리들이 마치 신선만이 산다는 도화동에 든 듯하다. 구봉팔문이다. 웅혼하지만 부드러운 소백산이 토해낸 갓 피어난 버섯처럼 아홉 개의 봉우리가 중국의 계림을 옮겨놓은 양 발 아래 펼쳐졌다. 문득 고개를 돌려 서북쪽 영춘을 바라다보니, 온달과 평강의 지극한 사랑을 담기라도 한 것일까, 구비를 따라 둘러쳐진 온달산성의 성벽이 일순 하트 모양을 만들고 있다.

▲ 온달 장군과 평강 공주의 사랑이야기 때문일까. 온달산성의 서북쪽은 하트 모양이다.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실지(失地) 회복이라는 출진시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신라와의 아단성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 영구(靈柩)가 움직이지 않으매, 평강공주가 와서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판이 났으니 아아 돌아가시오’ 하니 관이 움직였다고 전한다.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 때의 장수이다. 우리에게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로 더 잘 알려진 친근한 인물이다. 온달 일대기 속에는 설화적인 색채가 강하게 들어있다. 설화가 사실과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라고는 해도 그 속에는 당시 고구려 사회의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흥미거리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 온달공원에 세워져 있는 온달 장군의 동상.
천민이나 다름없는 평민의 신분에서 임금의 사위라는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고, 더없이 귀한 공주의 신분으로 바보같은 온달과 혼인을 한 평강이 남편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당시 신분구조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시대 반영물 중에서 당시의 시대상황을 형상화하여 이야기로 표현된 것이 설화라고 한다면 당시의 귀족세력이 중심을 이루던 지배체제에 천민이나 다름없는 평민의 신분으로 어떻게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인가?

온달이 북주의 무제군을 요동에서 격퇴하여 큰 공을 세워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혔다는 것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고구려 귀족세력간의 갈등으로 고구려 지배질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온달산성의 매력은 그 아담함에 있지 않은가 싶다. 대부분의 거대한 성들에서 느끼는 중압감을 온달산성에서는 느낄 수 없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치열했던 전쟁터의 살벌함을 희석시키기도 하겠지만 동문 쪽의 치성에 올라서서 성안을 보면 한아름에 안을 것처럼 작게 느껴진다. 이미 오래 전 사라져버린 우리네 돌담을 우연히 시골마을에서 만난 것처럼 색 바랜 성벽이 포근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 온달 장군의 공깃돌이라 전해오는 돌. 온달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으로는 온달과 관련된 많은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이곳이 신라와 고구려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온달산성과 관련된 지명으로는 장군목·대진목·방터·성재고개·쇄골·은포동·말등·은익이·면위실·군관·망굴여울·쇠점불이·표대봉·비마루·둔친머리·쉬는돌·분산골·바른골·피바위골·통쉬골·돌무지골·안이골·장방터·성골 등이 있다. 한편 충주 미륵리 절터에는 온달장군의 공기돌이라고 불리는 돌이 흔들바위의 축소판 형태로 남아 있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지명과 관련된 지역들을 찾아보며 촌로들을 만나 그 유래를 들어보면 또 다른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성산 중턱의 사모정에 오르면 1400년의 세월에도 변함없는 사랑을 전해주듯 남한강의 여울물 소리가 애틋하다.
온달산성을 뒤로하며 가파른 비탈을 뛰듯 내려오는 길에 잠시 성산 중턱의 사모정에 오르니 남한강 휘돌아 치는 여울물 소리가 못다 한 두 사람의 사랑을 전하기라도 하려는 듯 1400년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변함없이 애틋하게 들려왔다.

성 아래에는 성산굴(城山窟) 또는 남천남굴(南川南窟)이라고 불리는 온달동굴이 있다. 이 굴에서 온달과 평강공주가 함께 살았다고도 하고, 온달의 누이동생이 오빠 온달의 성쌓기를 돕기 위해 이곳의 돌을 치마폭에 싸서 나르다 보니 동굴이 생겼다고도 전한다. 이 동굴에는 일년내내 물이 흐르는데 이상하게도 윤달이 드는 해 4~5월에는 물이 마른다고 한다.

지금은 천연기념물 261호로 지정되어 1998년부터 일반에게 개장하고 있다. 한편 사지원(斜只院)2리에는 태쟁이탑(太祖大王塔)으로 불리는 돌무덤이 있다. 이 태쟁이 탑이 온달장군을 묻은 곳이라는 주장이 지역 향토사학자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즉 계립령과 죽령 서쪽을 회복하려 했던 온달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온달산성 아래 대진목에서 참패한 후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부상을 입고, 이곳 사지원리(당시 보수원-부상자 치료소)로 후송되었다.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에 임박한 온달은, 죽어서라도 고구려를 지키겠다며 자신의 무덤을 신라군의 진격지에 쓰게 하였다. 이 묘탑은 고구려 왕검성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이곳 태장에 온달의 시신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태쟁이탑으로 불리게 된 연유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곳을 지나다가 산세가 너무 좋아 그 흔적을 남기고자 돌탑을 쌓았는데, 이곳의 기우제는 그 효험이 높기로 정평이 나있다. 즉 가뭄 때 개를 잡아 탑 꼭데기에 피를 뿌리고 하천물로 개장국을 끓여 먹게 되면 피를 씻을 정도의 소나기라도 한줄기 꼭 내린다고 한다.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 장군총처럼 가로세로 20m 정방형의 계단식으로 되어 탑 앞부분에 입구가 있었으며, 돌탑위에 선돌을 세워 매년 정월달에는 금줄을 치고 제를 올렸다고 마을주민들은 전하고 있다. 영춘면 온달산성 주변 자연마을을 중심으로 온달과 관련된 전설과 민담이 전해 내려와 이곳이 옛 기록에 전하는 아단성일 것이라는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1. 남천계곡 :
원시적인 자연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소백산이 품고있는 자연의 보고. 온달동굴에서 4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

2. 구봉팔문 :
영춘면 남천리와 백자리 사이에서 시작하여 2개면 5개리에 걸쳐있는 9개의 봉우리와 8개의 골짜기

3. 온달 동굴 :
영춘면 하리 산62번지에 위치하며, 천연기념물 제261호로 온달산성 아래에 있어 ‘산성굴’이라고도 불리며 동국여지승람 호서읍지에 의하면 ‘남굴’로 기록되어 있다. 약 2억 4천만년 전에 생성된 석회암 동굴로 굴의 길이는 약 600m에 이르며 여섯 군데의 광장과 종유석, 석순이 잘 발달되어 있고, 내부에는 수심 80㎝ 정도의 물이 흐르고 있으며 이 물의 수원은 가곡면 보발리에 있는 ‘용소‘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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