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관리원으로 입사를 희망하는 중년 남성들에게 노동인권 강의를 했다. 강의는 아르헨티나 감독 산티아고 그라소의 유명한 작품 El EMPLEO(the employment, 고용)으로 시작했다. 작품에는 무표정-무감각-무언(無言)의 등장인물들이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노동을 ‘몸으로’ 수행하는 장면이 연달아 나온다. 면도를 하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는 거울 양 끝에 다른 사람의 하얀 손가락 끝이 보인다. 누군가 거울을 들고 있는 것이다. 아침을 먹으려 앉은 곳은 누군가의 구부린 몸이다. 테이블은 두 사람의 엎드려진 등허리다. 감독은 노동자의 몸을 사물에까지 확장시킴으로써 역으로 물화(物化)된 노동자들의 존재를 까발린다. 세계노동기구(ILO)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적어도 이 애니메이션 세계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인다. 노동자를 물건이나 부품처럼 취급하는 사람 역시 노동자이고, 그도 자신의 노동 현장에서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사람마다 개성은 보이지 않고, 그가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대한민국 노동자의 현실은 어떨까? 영상이 끝나자 잔뜩 불편해진 수강생의 표정이 생각난다.

 

'EL EMPLEO(2008)'. 산티아고 그라소의 6분 자리 단편 애니메이션이다.세계 단편영화제에서 백여 개의 상을 수상했다.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으니 시청을 권한다.
'EL EMPLEO(2008)'. 산티아고 그라소의 6분 자리 단편 애니메이션이다.세계 단편영화제에서 백여 개의 상을 수상했다.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으니 시청을 권한다.

 

적당히 (적게) 일할 권리, 안전하게 일할 권리, 충분히 쉴 권리… 노동자에게 해당하는 인권항목을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끝나고 나서 물었다. 노동자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수강생들의 말들을 받아 적으려고 보드마카를 꺼내 들었다. ‘사업주요.’ 적막을 깨고 한 분이 말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렇지, 사장 책임이지’라며 사업주에게 책임이 있다는 이야기가 메아리치듯이 이어졌다. 나는 화이트보드 위에 사업주라고 쓰고 옆에 ‘노동자’라고 써서 둘을 줄로 연결했다. 그리고 네모를 그려 사업주와 노동자를 둘러쌌다. 더 없을까요? 노동자의 인권에 대한 책임이 사업주에게만 있을까요?

내심 나는 다른 주체들을 호명하길 바랬던 것이다. 이를테면 국가. 강사가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초성 퀴즈를 냈다. 칠판에 ‘ㄱㄱ’이라 썼다. 다들 감을 못 잡으셨다. 잠시 뒤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국…가…?’ “네! 국가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다. 국가가 인권의 책임 있는 주체라는 사실이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토록 어렴풋하게 멀다.

오늘 이 시간에도 입법기관인 국회는 노동법을 만들고, 법을 수정하기 위한 활동을 한다. 국회 밖 여론 눈치를 봐가며 개선하기도 개악하기도 한다. 행정기관인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은 지역 노동자들이 겪는 임금체불 등 노동법 위반 사업장과 산업안전 문제를 관리 감독하는 특별사법경찰관이다. 지방자치단체장은 지방정부로서 지역 노동자의 인권과 기본권 보장을 위해 노력해야할 책임이 있다. 예컨대 제천시민이자 시멘트업종에 종사하는 임금노동자의 근로조건이 열악하다면 단순히 사업주에게만 읍소할 문제가 아니라 제천시장에게 묻고, 제천시의회에도 따져야 한다. 혼자 따지긴 쉽지 않으니 여러 동료들을 모아 함께 행동하는 상상도 할 수 있다. 여기서 또 다른 주체인 ‘시민사회’를 호명한다.

우리 몸이 뻗어나가야 할 방향은 –애니메이션과 달리, 어쩌면 이전까지 지속되어 온 것과는 달리- 물건이 아니라 어떤 행동이 되어야 하지 아닐까. 여기서 물건은 정치적이지 않은 존재에 대한 비유다. 물건은 제 아무리 멋지고 빛나더라도 온 몸을 다해 쓰여질 뿐,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거나 싸우지 않는다. 즉 정치적인 행위가 불가능하다. 정치학자 권정우·하승우는 공저 <아렌트의 정치>(2015, 한티재)에서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여성 유태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의 여러 정치학 개념들을 소개하고, 한국 사회를 진단한다. 예를 들어 정치, 공론장, 전체주의, 권력, 자유, 우정, 세계에 관하여. 그중 아렌트의 정체에 대한 짤막한 요약 설명을 소개해본다. “아렌트에게 정치는 독특함과 고유함을 가진 인간이 같이 살기 위해서 의견을 조율하고 협의하는 다양한 과정들이고, 인간은 정치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색깔을 찾고 자유를 실현하며 명예를 얻는다. (중략) 인간은 타고난 권리가 아니라 말과 행위로 공론장에 참여하면서 시민이 된다. 정치 없이는 시민도 없다.”

아렌트는 정치적인 행위가 없는 인간을 나치의 수용시설에 갇힌 수감자에 비유했다. 심지어 ‘각자 고립되어 먹고사는 데만 열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까지 한다. 정치로부터 도피하여 사적이고, 소비적인 삶에 치중해있는 대부분 현대인은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국가와 지본을 가진 권력은 사람들이 성실한 ‘근로자’, 합리적인 ‘소비자’, 순종적인 ‘학생’이길 바라는 것 같다. 그래서 ‘일자리’를 준다며 열심히 일을 시키고, 현란한 광고에 돈을 쏟아 붓고, 가르치려 한다. 그게 바람직한 시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익숙하다. 그냥 입 다물고 일하는 문화에, 그렇게 번 돈을 소비하는 데서라도 자유를 느끼는 일상에, 권위 있는 누군가의 멍청한 소리에 끄덕이며 받아 적는 행위에.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력이 부추기고 있는 기후위기와 불평등은 전방위적으로 정치하는 몸을 부르고 있다. 이 위기는 여러 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모습을 띈 얼굴로 찾아오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학대로, 누군가에게는 질병으로, 누군가에게는 사고로, 누군가에게는 차별로. 그러나 그만큼 구체적이고 다양한 목소리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장애인의 정치하는 몸, 노인의 정치하는 몸, 여성의 정치하는 몸, 청소년의 정치하는 몸, 성소수자의 정치하는 몸, 노동자의 정치하는 몸이 거리에 나와 자신이 만나고 있는 위기를 말하고 행동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꿈꾼다. 어쩌면 그러기 위해 나도 “위태로운 하루”를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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