쌉싸름한 나물처럼 조금 쓸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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쌉싸름한 나물처럼 조금 쓸쓸한
  • 이성배
  • 승인 2021.04.12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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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봄이 왔다. 어느 먼 마을에서는 선거 때문에 먼지바람이 심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사람 사는 일도 날씨처럼 변화무쌍하다. 그런데 그 변화의 진폭을 마음이 그때그때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높고 때로는 쓸쓸하다.

많은 사람이 농촌에 살 때, 아이들은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한 뼘씩 자랐고 동네 누이들을 통해 자연의 여러 냄새를 마음에 새겼다. 아이들은 동네 형들과 산과 들을 쏘다니며 놀다가 점점 넓은 도랑을 건너뛸 수 있었고 더 높은 나무를 오를 수 있었다. 누이들을 따라다니며 앉은 논둑이나 밭둑에서 냉이 냄새, 흙냄새, 바람 냄새, 물 냄새를 맡았다.

그런 동네 형들과 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모두 큰 마을로 떠났다. 얼마 뒤 명절마다 양손에 선물 꾸러미를 들고 돌아왔다. 그런 날이면 마을이 온통 환해졌다. 형과 누이가 없는 아이들은 마음이 영 쓸쓸해지기도 했는데 부모에게 무모한 투정을 부렸다가 한쪽 팔이 잡힌 채 빗자루 타작을 당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보란 듯이 결혼할 사람을 데려오고 택시를 타고 오던 발길이 자가용으로 바뀌었다. 토끼 같은 자식들과 고향을 찾던 그네들은 부모가 돌아간 뒤로는 고향을 찾지 않았다.

나이가 드니 사랑도 정치도 믿기지 않는다. 다만, 그리운 날이 많다. 마을을 떠났던 동네 형들과 누이들은 잘살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꾸려 빈 들로 나갔다. 꽃대를 세우고 있는 냉이는 이미 나물로 먹기에는 늦었다. 냉이보다 더 빨리 꽃대를 올린 꽃다지는 노란색 꽃을 한껏 피웠다. 논둑이나 밭둑 가득 흔들리던 희고 노란 꽃무지들. 바라보기만 해도 까무룩 까무룩 잠이 쏟아지던 유년의 봄날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할머니 치마폭처럼 품이 넓게 자란 지칭개는 몇 뿌리만 캤는데도 수북하다. 자박자박 씻고 데쳐 무치면 쌉싸름하니 입맛을 돋울 것이다. 콩가루를 묻혀 국을 끓여도 입 안 가득 향이 그득 고일 것이다. 망초도 고랑 여기저기 소복소복해서 금방 한 바구니 채울 것 같았지만 워낙 그 수가 많아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봄바람이 잠시 머문 자리처럼 여리여리한 벌금다지는 깨끗하게 씻어 생으로 초고추장에 버무려 먹으면 맛있겠다. 땅 위로 드러낸 설렁설렁한 모습과 달리 뿌리의 맛이 일품인 황새냉이, 작고 흰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앙증맞은 좁쌀 냉이. 아직 긴장을 풀기에는 이르다는 듯 땅바닥에 바짝 붙어 있는 달맞이. 여름 보름달이 뜰 때 노란 꽃을 보는 것도 좋겠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로운 밭처럼 보였는데 가만히 앉아 자세히 보니 생명 천지다. 정치를 한다는 어느 누가 이처럼 향기롭고 푸르단 말인가? 사람 북적이지 않는 햇빛과 바람의 도래지. 이목을 끄는 모습은 아니지만 해마다 같은 자리에 돋아 아낌없이 내어 주는 풀처럼 사람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는 정치인은 어느 먼 마을에 있을까?

각자 사정은 틀리겠지만 요즘 돈에 대한 집착이 더 또렷하게 보인다. 코로나 초기 사람의 발길이 끊기자 오염되었던 강이 맑아지고 물고기가 돌아왔던 것처럼 자본주의적 인간의 본능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듯하다. 안하무인(眼下無人), 대놓고 핏대를 높이고 삿대질이다. 돈, 권력, 종교, 정치는 점성이 좋아 서로 접착이 잘 된다. 이 숨 막히고 뜨겁고 경쟁적인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네 형들과 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산과 들에서 풀을 뜯어 식구들의 허기를 채운 때가 있었다. 최근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고민하거나 거기에서 파생된 여러 형태의 생활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라고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질주하는, 뒤처지지 않도록 맹렬하게 속도를 높이는 움직임 또는 갈망 자체만 남은 듯 보인다. 이천이십일 년 봄. 나이 들어 생뚱맞게 장바구니 하나, 호미 하나 챙겨 빈 들로 간다.

“저기유, 쌉싸름한 지칭개 나물 좀 드셔 보실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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