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내 실내화 가방은 쓰레기 가방이나 마찬가지였다. 좋아 보이는 것만 보면 제 둥지에 모으는 까마귀처럼 모든 물건을 가방이나 자리에 두곤 했는데, 그 습관은 쉬이 고쳐지지 않아 꽤 오랜 시간 쓰레기 가방과도 같은 실내화 가방을 매일 무겁게 들고 다녔고, 전교에서 가장 더러운 자리를 가진 학생이 되어 매년 새로운 담임선생님의 구박을 받곤 했다. 나와는 상이할 정도로 청소를 잘하는 엄마와 동생은 조심스럽게 내 자리를 치워주며 저장 강박에 대해 나름 존중해주려 했다. 하지만 더 크면서 내 개인물건에 손대는 것도 몹시 싫어하자 그냥 내 방문을 닫아 놓고 사는 것으로 타협해야 했다. 성인이 되어 독립하고 나서도 저장 강박은 버려지지 않았다. 넉넉하게 시작했던 8평 원룸이 점점 좁아졌다. 네 벽면을 물건으로 꽉 채우고도 버리질 못해 테트리스 기술만 늘어가는 생활……. 내가 봐도 참 무거운 짐들이었다.

그러다 내 삶을 완전히 뒤바꾼 일이 발생했다. 바로 ‘미니멀리즘’을 만난 것이다. 1년 전 유튜브로 접한 ‘미니멀리즘’은 내게 한동안 매주 50리터씩의 쓰레기를 내보낼 수 있게 하는 의지를 주었다. 쓰지 않지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은 당근마켓에 되팔아 소소한 용돈 벌이도 하였다. ‘내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의 위치를 내가 알 수 있는 수준이 되자’라는 목표에서 시작한 비우기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름 성실하게 실천해서 이제 ‘10개 이내의 박스로 이사할 수 있는 수준이 되자’라는 목표로 변경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미니멀리즘’이라는 생활 사조는 그 역사가 유구하다. 1960년대 미국에서 단순함을 추구하는 시각 예술사조에서 시작했다. 모든 요소를 최소화한 미니멀리즘은 현대 디자인에도 영향을 끼치며 휴대폰의 이어폰과 충전 단자를 빼내는 중이다. 디자인과 인테리어 등 시각 예술뿐 아니라 생활의 영역까지 확장한 오늘날의 미니멀리즘은 현대인에게 많은 것을 선물했다. 옷을 가볍게 정리하여 옷 고를 시간에 자신을 위한 모닝커피 한잔을 선사할 시간을 주었다. 일회용품 소비로 가득한 세상에 다회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사용하게 해 쓰레기를 줄여 환경을 보호했다. 불필요한 것을 구매하지 않게 해 경제적으로 여유를 주었다. 나처럼 공간을 물건으로 가득 채워왔던 사람에게는 비어있는 공간을 주었다.

미니멀리스트라고 부르기엔 부족한 나이지만 그래도 나름 실천해보며 얻은 가장 큰 선물은 ‘남아있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태도’이다. 적게 남기기 위해 꼭 필요하거나 예쁜 것을 남겼다. 소중한 마음을 담은, 남은 물건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내게 남아 좀 더 귀해진 물건이, 정성스럽게 비워낸 공간이 나를 더 귀하게 대해 주는 것 같다. 외부에서 끌어올 ‘바랄 것’이 없어지는 것, 지금의 삶이 더 귀해지는 것. 이게 미니멀리즘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이 정도면 미니멀리즘은 내게 자본주의 판 유토피아나 마찬가지이다.

‘소유’보다 ‘비움’으로 얻는 기쁨이 커질수록, 미니멀리즘으로부터 받는 선물이 더 감사해질수록 이 선물을 주변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점점 꿈꾸게 됐다. ‘우리 동네가 미니멀리스트라면…….’ 재화가 풍부하기만 바라는 지금의 동네가 아닌 미니멀리스트 동네를, 까마귀처럼 온갖 것을 모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세련된 걸 남기고 싶어 하는 우리 마을을 상상해보았다. ‘동네 주민들이 모두 리필 스테이션에서 식자재와 샴푸·린스를 산다면, 거리에 플라스틱이 줄어들어 쓰레기 대란 뉴스도 사라질 텐데. 대형쇼핑 매장에 가서 소비에 몰두할 시간에 책 한자의 감동을 친구와 나눌 텐데. 외부에서 유입될 인구에 집착하기보단 여기 함께 사는 이웃을 더 귀하게 여길 텐데.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오는 걸 반기기보단, 동네 주택이나 빌라를 찾아볼 텐데. 남은 건물이 점점 허름해지는 게 아니라 세월이 준 고즈넉함을 줄 텐데.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들의 짜증나는 투기 기사 같은 건 볼 필요도 없을 텐데.’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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