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한 때가 생각난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 아카데미’를 다녔다. 아카데미의 효과는 대단했다. 글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나름 책과 가까이 살아서 학창 시절부터 다독상과 독후감상을 곧잘 타곤 했던 나였다. 그저 숨 쉬는 일상과 마찬가지였던 글이 생판 남이 되어버렸다. 내가 쓰는 문장과 단어의 조합이 모두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고 모든 문장이, 문장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의 그 두려움! ‘난독’이라 해야 할지 ‘슬럼프’라 해야 할지 지칭할 수 없는 이 현상은 이 이후로도 자주 나를 찾아와 곤혹스럽게 했다. 글의 세계는 나의 곤혹스러움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저 채찍질하고 쓰게 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멀어지기만 하는 글은 도대체 뭘까. 단순히 언어의 기록이라고 하기엔 휘발되어 없어지는 말과 비교하면 쓰는 이에게도, 읽는 이에게도 무척 다채로운 영향을 미친다. 글을 쓸 때를 생각해보자. 부정적인 감정을 신체로 배설하면 대체로 폭발되어 사라진다. 반면 이 과정을 글쓰기로 하면 ‘정리’된다. 긍정적인 감정은 글에 담으면 마치 멋진 전시물 같아져 찬란해지기도 한다. 물리적인 현상과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말’이라는 비루하기 짝이 없는 생각 조각을 모아 ‘글’이라는 형태로 정돈할수록 작아지는 게 아니라 더 크게 확장하고 명료해진다. 글쓰기의 신비함을 느끼면 뇌가 타버리는 고통 속에서도 글쓰기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독자의 입장이 되어 글을 읽을 때도 신비함은 멈추지 않는다. 읽는 행위를 통하면 어떤 매체보다도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명확하게 타인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내 글을 읽는 다른 이에게도 이러한 현상이 작용이 있길 기도하게 만든다.

한편으로 글쓴이가 가지는 두려움도 있다. 평가받을 거라는 두려움의 단계는 그저 시작일 뿐이다. 글이 가진 무게감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글이 담고 있는 정보는 단순한 언어 정보가 아니라 의견이자 논평이자 역사이다. 한 기자 친구의 한 마디가 생각난다. 자신의 글은 세상에 진 빚이라며 눈물이 그렁했다. 그가 느낀 글에 대한 어마어마한 무게감에 나도 함께 짓눌리는 것 같았다. 휘발되지 않는 기록. 글의 무게감은 글쓴이는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영상매체가 아무리 발달해도 글이 가진 원초적인 힘은 퇴색되지 않는다. 여전히 새삼스럽게 ‘낯선 얼굴’로 나와 마주하는 글쓰기에 이리저리 휘둘리지만, 마음이 아파 글을 읽지 못한 시기에도 손가락을 놀리며 애증의 글쓰기를 멈출 수 없었던 것은 글의 힘을 선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성과 단어와 문장의 에너지를 담는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열려있다는 것은 축복이며 혜택이다.

2020년, 꿈이 있었다. 1년 동안 책 한 권의 원고를 써서 2021년에 출판하는 것. 제목과 목차도 다 정해두었다. 출판사와 만나 책을 내는 과정도 알아보며 깨달은 게 있었다. 책 한 권을 출판하기까지의 지은이는 오직 지은이만이 아니라는 것. 수많은 기적의 시간을 지나 누군가의 글이 내게 도달한다는 것을 말이다. 기적을 넘어 글을 읽고 뇌에 저장하고 마음에 박는 과정이 무척 숭고하게 느껴졌다. 비록 개인적인 사정으로 2020년에 목표하던 책을 쓰진 못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많은 사람과 협업하며 다른 책을 내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다. 우리의 책이 누군가의 마음에 박히는 기적을 기다린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