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렇게나 키가 컸던가! 공포심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특별히 달라진 건땅을 딛고 있는 면적이 발바닥만큼의 넓이에서 3㎝ 정도 되는 토박스 넓이만큼 좁아졌다는 점이었을 뿐. 등에선 식은땀이 나고 발목은 바들바들 떨렸다. 이윽고 나를 이끌던 음악이 멈추었다. “천천히 플렉스(flex) 하며 내려오세요.” 땅으로 돌아와도 된다는 선생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렇게 기다리던 명령이었지만 떨리는 발목은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쿵” 둔탁한 소리가 났다. 땅으로 착지하긴 했지만 ‘천천히’ 내려오라는 미션은 수행하지 못했다. 어쨌든 두 발바닥으로 서 있을 수 있어 안전했다. 세상에나 서 있는 게 이렇게 안전할 일이라니. 새로이 깨달았다. 토슈즈 클래스 첫날의 느낌이다.

초등학생 때 하던 발레를 다시 하기 시작한 건 2018년 가을께였다. 만성적으로 앓던 허리 통증이 도져 운동을 찾다가 결정한 종목이다. 오랜 시간 잊고 있던 동작들이었지만 그래도 제법 몸은 기억하고 있어 곧잘 따라 했다. 하루하루 흘리는 땀방울만큼 뻣뻣하게 굳었던 관절이 유연해지고, 말랑하던 근육은 단단해졌다. 2021년, 새해는 초등학생 때 신지 않고 끝낸 토슈즈를 신어 보자는 새로운 목표를 시행하는 중이다. 2년 넘게 해온 발레가 또 새롭게 느껴진다.

발레는 하늘에 가까이 가기 위한 춤이라고 한다. 까치발을 뛰고, 심지어 발가락만으로 설 수 있는 토슈즈까지 신어가며 하늘에 닿으려고 노력한다. 인간의 오만함을 벌주려는 걸까. 그 대가로 몸에 지독한 통증을 남긴다. 프로 발레리나, 발레리노, 취미로 발레를 하는 나 같은 사람까지 너나 할 것 없이 걷는 순간마다 종아리가 타는 것 같은 근육통, 움직일 때마다 부러질 것 같은 고관절 통증, 날개 뼈와 어깻죽지에서 곧 날개가 돋아날 것 같은 찌릿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저 다리를 180도 찢을 수 있으면 되는 게 아니다. 온몸에 섬세한 근육이 촘촘히 생성되어야 한다. 찢어질 것 같은 근육통을 앓으면서도 또다시 근력이 닿는 최대한의 에너지를 하늘로 뻗으며 춤추는 발레의 매력은 뭘까.

 

“직접 음악이 될 수 있죠. 그게 춤이에요. 음이 되고 악기가 되고 비트가 되는 거요. 춤추면 그런 기분이에요.”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댄스 드림: 핫 초콜릿 호두까기 인형> 中

 

흔히 ‘발레’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날씬한 발레리나가 코르셋을 착용하고 하늘하늘한 춤을 추는 것이다. 더구나 실연당한 여주인공의 비참한 죽음을 담은 내용이 대부분 고전발레의 이야기기도 하다. 고전발레에선 당연한 이미지이긴 하지만,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려는 최근 추세에서는 선뜻 호감 가지 않을 수 있는 장벽이 되기도 하는 관념이다. 물론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게 발레도 변화하는 중이다. 성별 구분을 짓지 않는 현대 발레(contemporary ballet)는 발레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볼레로」(안무: 모리스 베자르/작곡:모리스 라벨)는 그저 ‘음악을 춤추는 인간’을 가장 멋지게 표현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약 15분간 이어지는 리듬 속에서 무용수의 근육은 부풀어 오르고, 붉은 테이블 위엔 무용수의 땀방울이 흐트러진다. 관객들은 쿵쿵대는 진동이 타악기에서 나온 진동인지 압도당한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저 취미로 발레를 즐기는 나로서는 「볼레로」와 같은 작품은 시도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직접 음악이 되는 기분까지 즐기지 못하는 건 아니다. 발레의 매력은 수십 번 빙글빙글 돌 줄 알아야 한다거나, 다리를 180도 찢을 줄 알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발레리나처럼 가느다란 몸을 가져야만 멋지게 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간단한 바워크(barre work. 바를 잡고 하는 기본동작)만 하더라도, 팔 동작(포르 드 브라, port de bras)만 하더라도 누구나 직접 음악이 되는 순간은 즐길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멋있게 느껴질 수 있다. 발레에 대한 딱딱한 고정관념은 버리고, 직접 음악이 되는 세계에 더 많은 사람이 문을 두드리면 좋겠다. 영원히, 매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발레의 매력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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