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기사

- 서울시동북권NPO지원센터 공익활동 발굴…조직화 가능
- 지역별 수 년 동안 활동한 엄마들 자조모임이 기본토대 이뤄
- ‘쉬운 책’ 만드는 피치마켓, 느린 학습자 교육에 실질적 도움 돼

느린학습자워킹그룹 관계자들이 '느린학습자시민회' 창립을 위해 회의하고 있는 모습.
느린학습자워킹그룹 관계자들이 '느린학습자시민회' 창립을 위해 회의하고 있는 모습.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지원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서울지역에서 이들을 위한 단체가 만들어질 예정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경계선지능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사회적인 인식을 개선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 이 단체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단체의 정식명칭은 ‘느린학습자시민회’다. 여기서 느린 학습자란 경계선지능인과 그와 유사한 특성으로 사회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말한다. 배우는 속도가 평균보다 느리기 때문에 그들에게 맞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단체는 각 마을별로 이미 조직된 엄마들의 자조모임이 기본 토대가 됐으며 서울시동북권NPO지원센터의 느린학습자 워킹그룹 활동이 계기가 돼 조직됐다. 특히 최근 아름다운재단 공모사업에 선정, 예산을 확보함에 따라 활기를 띄고 있다.

느린학습자시민회는 앞으로 느린학습자에 대한 인식개선 활동과 지원의 근거가 되는 법률제정, 동시에 ‘엄마들 자조모임’의 한계를 극복하고 경계선지능인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구심점이 된다는 계획이다. 12월 중순 창립총회를 하고 내년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할 계획이다.
 

목마른 사람이 정말 우물 팠다

느린학습자워킹그룹 제공.
느린학습자워킹그룹 제공.

이 단체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경계선지능아동을 자녀로 둔 엄마들의 노고가 있었다. 엄마들은 지역사회와 학교에서 차별받는 자신의 자녀를 위해 스스로 모임을 만들었고 부모 치유프로그램과 아이들을 위한 학습·사회성 향상 프로그램을 지난 5~6년간 묵묵히 운영해 왔다. 그동안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에서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모임을 시작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던 것이다.

경계선지능인 자녀를 둔 엄마들의 자조모임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2015년 서울시 강서구의 ‘바다를 꿈꾸는 거북이’다.

‘바다를 꿈꾸는 거북이’가 만들어진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아동들의 사고를 확장시키고 욕구를 발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고 양육과 교육, 치료, 직장생활 등으로 지치고 힘든 부모들의 스트레스를 경감시킨다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었다.

느린학습자워킹그룹 제공.
느린학습자워킹그룹 제공.

자비를 들여 매주 만나 놀이체육과 숲 체험을 진행하고 △연극놀이 △성교육 △부모교육 △캠프 △상담 등을 활발하게 프로그램을 이어갔다. 느린 학습자 워킹그룹 PM 오미정 씨는 “지역에서도, 학교에서도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던 느린학습자와 부모들의 참여가 생각보다 활발했습니다. 그동안 독박육아에서 벗어나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던 것이죠”라고 말했다.

‘바다를 꿈꾸는 거북이’ 이외에도 현재 수도권에는 △소나기(성북구) △오르미협동조합 △구로구 부모커뮤니티 △꿈꾸는 달팽이(경기남부) △꽃피다(꽃이 피는 시기가 다를 뿐이랍니다, 노원구) △청년숲 등 6개의 자조모임이 더 있다. 각 모임마다 많게는 100여명 적게는 30~4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아이 또는 부모를 위한 프로그램 진행 이외에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느린 학습자(특히 경계선지능아동)가 사각지대에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각 지역마다 개별적으로 있던 모임들은 지난 2017년 서울시동북권NPO지원센터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연대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2018년 ‘느린학습자워킹그룹’이 만들어졌다.

느린학습자워킹그룹 제공.
느린학습자워킹그룹 제공.

느린학습자워킹그룹에는 서울시 지역의 복지관, 느린학습자를 위한 대안학교 교사 등이 함께하고 있다. 현재 4기를 맞고 있으며 △공간(마을배움터)마련 △느린 학습자 생애주기별 연구보고서 발간 △공론화 △활동가 역량강화 △조직화 등의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 9월 서울시의회 행정자치위원회 회의에서 원안 가결된 ‘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 조례안’도 느린학습자워킹그룹과 엄마들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서울시동북권NPO지원센터가 도왔다

느린학습자시민회 전신은 엄마들의 자조모임이다. 그러나 엄마들의 활발한 참여와 활동만으로 공익단체인 느린학습자시민회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서울시동북권NPO지원센터의 도움이 있었다.

서울시 동북권NPO지원센터는 2017년 '서울특별시 시민공익활동 촉진에 관한 조례 제정(2013)'에 의해 만들어졌고 현재 서울시 위탁으로 운영되고 있다. 비영리민간단체와 공익활동을 하는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중간지원조직으로 공익활동을 촉진, 발굴, 지원, 하고 있다. 느린학습자워킹그룹은 2017년 당시 센터 시범운영 기간동안 의제발굴 사업의 하나로 채택된 것이다. 

오미정 씨는 “나만의 문제에서 우리의 문제, 지역의 문제로 확장시켜야 하고 사회·정책적으로 의제를 설정하면서 지속적인 모임을 이어가야 하는데 부모들이 이 모든 것을 다 하기는 쉽지 않죠. 그런 면에서 동북권NPO지원센터 활동가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조직을 확장시키고 체계화할 수 있었던 것이죠"라고 설명했다.

이어 “부모들은 내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어떻게 바꿀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없어도 우리 아이들이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충북에서도 엄마들의 자조모임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이들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경계선지능아동들이 어려움에 있다는 점을 알릴 계획이다. 경계선지능아동을 자녀로 둔 엄마들의 모임(밴드) ‘엄마토닥아빠도담(엄마토닥)’ 리더인 정희영 씨는 “충북에서도 엄마들의 자조모임을 만들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공간도 없고 단체를 만들려면 여러 법조항과 서류작성법도 알아야 하는데 부모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자체나 시민단체에서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전했다.

 

정보격차 줄이는 ‘피치마켓’

피치마켓에서는 2015년부터 '쉬운 책 만들기'와 독서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피치마켓에서는 2015년부터 '쉬운 책 만들기'와 독서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서울 및 경기도 일부 지역에서 경계선지능아동과 관련, 단체가 생기고 조례까지 제정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5년째 ‘쉬운 책’ 만들기를 하고 있는 피치마켓의 역할도 있었다.

피치마켓은 경계선지능아동 및 발달장애인을 둔 부모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단체다. 독해력이 평균보다 떨어지는 아이들을 위해 기존에 발간된 서적을 재구성해 느린 학습자들을 위한 맞춤형 도서를 발간하고 있다.

피치마켓이 처음 발간한 책은 2016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문단 및 문장의 형태, 글자체, 글자의 크기 및 자간, 쪽 번호 크기까지 느린 학습자를 고려했고 내용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시작으로 피치마켓이 현재 번안한 책은 알퐁스 도데의 ‘별’, ‘마지막 수업’, ‘어머니’,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O.헨리의 단편집 등 수십 권이다. 또 지난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발달장애인용 쉬운 대선후보 공약집을 펴냈고, 그림이 포함된 쉬운 근로계약서를 만드는 일도 진행했다. 이 책들은 현재 특수학교에서 활용되고 있다.

경계선지능아동 부모들의 자조모임 대부분에서 피치마켓에서 발간된 책은 필독도서다. 대다수 부모들이 이 책을 활용해 독서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

피치마켓의 함의영 대표는 “느린 학습자들이 책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과 공감대를 찾고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고  정보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피치마켓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라고 전했다. 그동안 느린 학습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도서는 전무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함 대표는 “느린 학습자들은 독해력이 평균보다 약하기 때문에 읽을 수 있는 도서가 극히 제한적입니다. 어릴 적 읽었던 아동용 동화가 전부인 셈이죠. 성인이 된 후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는 정보가 많은데 그들을 위한 책, 안내문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현재 피치마켓은 경계선지능인 뿐 아니라 발달장애인을 위해 도서를 매달 3권씩 발행, 특수교육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 특히 5년째 수천 명이 참여하는 독서프로그램을 온·오프라인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특수학급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교과서 발행도 준비하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에서 단순히 '느리고 더딘 사람'쯤으로 분류 돼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경계선지능인.

엄마토닥의 정희영 씨는 “그동안 나만의 문제,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었는데 서울에서는 단체가 만들어지고 조례가 제정되고 있다니 부럽습니다. 우리도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지역에서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