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한해의 마지막 밤을 하얗게 새우고 검은 빌로드가 펼쳐진듯한 밤하늘을 바라본다. 세월이 빠르다는 말은 인생이 유한하여서만은 아닐것이다. 삶의 중반을 훌쩍 넘어선 지금까지 활활 타오르지 못하고 하루하루 젖은 솔잎 태우듯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매사에 자신없어하는 나약함과 지난날 소망했던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무의미한 삶을 살아온 회환과 새로 싹트기 시작하는 작은 희망속에서 한밤중 제야의 종이 울리는 시각에다 금을 그어놓았다. 그리고 그 안쪽과 바깥쪽에다 무수한 의미를 부여하며 생각했다. 가슴 가득 차있는 욕망과 애증 . 비움으로 찾아드는 평온함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었던 그들과 이별준비를 하고 종소리를 들으며 가슴속에 깊게 갈아앉아 있던 그들을 떠나 보냈다. 언제까지 닿을수 없는 사랑과 꿈과 젊은날의 추억속에서 맴돌며 가슴앓이를 할것인가. 그것은 소망 뿐이었고 그리워 할수록 아픔뿐인걸....

나는 떠나보냈다고 하면서 돌아서는데 그들은 나보다 먼저 돌아와 더 깊이 박혀 서성거린다. 마음을 정하는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음은 비울줄 모르는 오만과 집착때문일것이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다. 이제 부질없는 옛일은 가는해에 묻어두고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작은 꿈을 위해 밝은해와 마주서고 싶어 새벽의 여명속에서 산을 향해 걸었다. 시리도록 밝은 새벽달과 맑게 빛나는 별빛들이 빈나무가지 사이로 하얗게 쏟아지고 있다. 그 경이로운 풍경에 발길을 멈추지 못하고 산길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겨울이 깊어진 산자락에는 낙엽이 무심히 쌓여있고 나무들은 언제 새잎이 돋을까 싶을정도로 앙상한 모습이지만 모든 체험과 변화를 겪은뒤 말없이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벌거벗고도 당당하기만한 가지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다.

산길을 걷다보면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지나간 날들과 앞으로 다가올 불투명한 날들. 그리고 새해를 맞을 때마다 생겨나는 작은 희망들, 다짐들. 한해가 지나고 나면 크게 달라진것도 없건만 연연히 꽃피듯 되풀이 되는 일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길옆에 비켜서서 인간사는 세상을 내려다 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길을 중심으로 마을이 보이고 앙상한 나무사이로 나 있는 오솔길도 보이고 논뚝길도 보이고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뻗어있고 멀리 냇물이 흘러가는 물길도 보인다.

나는 때때로 살아가는 길이 혼미하고 힘에 겨우면 높은산을 올라 내려다 본다. 그러면 길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선명하게 보일뿐더러 내 자신이 어디쯤에 와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된다. 내가 가야하는 길은 너무도 선명한데 힘이들면 외면하려 들고 자꾸만 다른길을 기웃거리던 날들도 더러는 내게 있었다. 야물지 못한탓에 쉽게 상처받고 아파하고 외로움도 많이타서 주윗사람들을 힘들게 했고 그럴때마다 더욱 단단한 성을 만들어 나를 가두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못나고 보잘것없는 모습이지만 세상에 나를 내놓고 싶다. 며느리도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내 이름으로 당당하게 불려지는 문학의 꿈을 가진 한 여자이고 싶어진다. 지난날 어린 소녀였다가 어느순간 아가씨로 불려졌을때의 그 빛나던 날들과 무엇이든 다 해낼수 있을것 같던 자신감을 모두 되찿을수는 없지만 매력없는 아줌마의 시간에서 할머니의 시간으로 넘어가기전에 다시 한번 꿈을 펼치고 진주처럼 은은한 빛을내는 사람으로 살려고 한다.

자신을 빛내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새해에는 이룰수 없었던 꿈은 접어두고 새로운 꿈을 꾸는 작은 소망하나 간직한다. 또다시 한해가 지나 지금의 이 소망이 점점 퇴색되어지는 꿈으로 남을지라도....

멀리 어둠을 밀어내며 산등성을 따라 길게 붉은띠가 드리워진다. 순간 보석처럼 반짝이며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저렇게도 밝고 붉은 빛이 있었던가. 나도 모르게 두손이 모아지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서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다 살며시 눈을 감아본다. 내 가슴속으로 떠오르는 또 하나의 태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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