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모죠의 일지] 40화 ‘집이 나라인 만화’ 편에서 작가는 말한다. 각각의 집이 마치 하나의 나라 같다고. 사람마다 ‘당연함’의 기준이 각각 다른데, 대개 그 기준은 집에서 만들어져 그 수준이 하나의 나라로 볼 수준이라는 것이다. 비유를 든 내용이 재미있었다. 많이 먹어 나라에서 온 많이 먹어 인(人), 목소리 커 나라에서 온 목소리 커 인, 개그개그 나라의 개그개그 인, 심지어 방구 자유 가정 출신과 방구 금지 가정 출신 등 많은 나라와 출신이 있다고 한다. 각자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수많은 ‘당연함’의 기준을 가지고 모여있기에 세상은 재미있단다.

나는 내 나라에서만 살고 있으니 정작 무슨 나라에 살고 있는지 몰랐는데,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두 개의 이름을 명명해주었다. 하나는 선수선수 나라이다. 우리 집은 마치 태릉선수촌 같아서 방문자(입국자)들은 스트레칭과 복근 운동, 푸시업 등 운동 몇 세트를 기본 입국절차로 거쳐야 한다. 땀 한 바가지를 흘리기 전까지 아직 밀입국자에 불과하다. 입국절차를 거치고 나면 비로소 임시비자가 발급되어 ‘아 드디어 선수선수 나라에 입국했구나’ 한다. 선수선수 나라의 총리쯤 되는 내겐 이러한 입국절차가 당연하기만 하다. 우리 집(아니, 선수선수 나라)은 드라마를 보더라도 절대 그냥 앉아서 보는 법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청하는 한 시간 내내 고관절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다리 찢기를 하고 있는 게 당연한 곳이다.

내 나라의 두 번째 이름은 풀코스의 나라이다. 뭐든 대충은 없다. 풀코스를 갖추어야 시작한다. 피아노를 쳐보겠다면 중고서점에 가서 바이엘부터 쇼팽까지 난이도별 악보를 싹쓸이해야 시작한다. 집에서 취미로 발레를 하겠다면 전신 거울과 발레바까지 장비를 갖춘다. 만일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스테들러 색연필 72색 풀셋팅을 갖추고 나서야 시작한다. 아무리 내가 5색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똥손일 지라도.

차를 마시고자 해도 녹차 하나만 마시거나, 보이차 하나만 마시는 법은 없다. 입맛을 돋우는 애피타이저 차, 감각을 차에 푹 잠기게 하는 본 차 몇 차례, 뱃속이 휘지면 먹을 달콤한 다과, 마지막 입맛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게 할 마무리 차까지 풀코스를 거쳐 마신다. 이러한 내가 미니멀리즘에 필(feel)이 꽂히면 더 웃긴다. 전 세계의 미니멀리즘 관련 책과 영상을 미친 듯이 섭렵하고 맥시멀하게 상상한다. 머릿속엔 온통 미니멀리즘으로 꽉 차서 입만 열면 미니멀리즘을 말한다. 미니멀리즘은 비우는 사조라는데 나는 미니멀리즘까지 꽉꽉 채워야 하는 사람이라 오죽하면 ‘미니멀리즘 맥시멀리스트’라 불렸다. 정말 말 다했다. 

삶의 무게가 무겁고 인생이 고단할 때 과거엔 고단한 무언가를 자신과 아예 합체시켜서 그 자체가 되어버리는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던 듯하다. 나는 ‘워커홀릭’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 여기던 아버지 세대를 오랜 시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워커홀릭’이 되기까지는 절박한 사회 환경 탓도 있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방법이 하나의 탈출구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은 그 시대상을 드러내는 말이지 않을까. 다른 세계를 아예 보지 않아 버리는 편이 괴로워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해야 할 똥은 웬만하면 피하는 것’을 더 현명하다 여기는 요즘엔 과거와는 다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스스로에게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주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상에서는 최대한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숨죽이고 있는다. 직장 따위는 그저 돈 값을 하는 것으로 의의를 둘 뿐이다. 대신 이외의 시간에 취미생활을 하고, 동호회에 참여하고, 여러 모임에 갖는다. 여러 개의 세계를 만들어 놓으면 하나의 세계가 자신을 훼손시켜도 다른 세계에서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다. 누군가는 힘든 현실에서 도망가는 것이라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방법이라는 점에선 오히려 이 방법이 더욱 합리적이지 않은가? 세상에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니 말이다.

세상은 내가 실제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넓은 것이 분명하다. 상공에 올라가 보이는 작은 불빛 하나하나의 집마다 하나의 나라가 있다. 청주에만 36만 개 넘는 숫자의 나라가 있는 셈이다. 어느 날 문득 내 세계가 구질구질하다 싶은 순간에는 다른 나라로 출국해보라. 일단 선수선수 나라와 풀코스의 나라가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지 않은가. 잠시 모국은 버려두어도 좋다. 이 칼럼은 초대장이다. 입국절차는 간단하다. 플랭크와 스쾃, 다리 찢기 몇 번 정도면 얼마든지 임시비자를 발급해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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