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기사

 

한 겹 두꺼운 이불 같은 잠을 자고 나면 푸르스름한 이른 아침의 햇살이 마룻바닥부터 방 곳곳을 물들인다. 아슴푸레했던 의식은 선명해지고 등이나 엉덩이에 쏠려있던 기운이 가슴, 어깨, 목을 지나 눈 주위로 흘러온다. 아파트 1층인 나의 집 앞에는 나무 몇 그루가 있고 새들도 가끔씩 깃들곤 하여 아침부터 새 울음을 듣는 호사를 누린다. 선명해진 정신과 함께 저 밑에 웅크리고 있던 허기가 날카로운 가시를 내고 위장을 찌르기 시작한다. 주방으로 가서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인스턴트 스프 분말을 푸른 사기그릇에 털어 넣는다.

문득 대부분의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식사를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의 수면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차오르는 허기와 함께 아침 식사를 궁리하거나, 정해진 루틴대로 시리얼에 우유를 붓고 있는 사람도 있으리라. 회사나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구내식당에 가서 식판에 반찬과 밥을 담고 있을 수도 있겠다. 아침을 준비하려고 손에 물을 묻히는 사람 중 대다수는 여성이거나 고용된 노동자들일 것이다. 

어렸을 때 ‘큰일하라’, ‘성공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내가 큰일 할 사람처럼 보여서가 아니라 모든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들을 어른들은 건넸다. 아버지 책장에는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 있었고, 담임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칠판에 ‘Boys, be ambitious!(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를 쓰며 큰 꿈을 가져야 한다고 설파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작은 일과 노동의 베풂 속에서 유지되는 걸 강조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열심히 하면 티가 안 나고, 조금이라도 하지 않거나 잘못하면 티가 나는 노동들을 떠올려보자. 밥 짓는 일, 청소, 건물 관리 그리고 라디오·TV 진행 스탭 등등이 생각난다. 격주마다 인터뷰이로 참여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비정규직 작가가 인터뷰 주제, 대본, 진행 시간, 통화 품질, 다음 회차 일정 등등에 관해 인터뷰이와 하나하나 상의하고 준비한다. 이 중 한 가지라도 놓치면 흔히 말하는 ‘방송 사고’가 날 수도 있다.(일전에 인터뷰지 중 한 장을 놓치는 바람에 5초 이상 침묵이 흘렀던 적이 있었더랬다. 참으로 고요한.) 우리는 일상을 작동 시켜 주는 이들을 그동안 평가절하 해왔던 건 아닐까.

삶(또는 어떠한 사건)을 하나의 큰 덩어리로 바라보면 그 이면에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이해관계들, 각자의 배경과 맥락들, 그때의 감정과 의도, 진지한 말과 사사로운 농담, 그 말들이 암시하는 의미들… 이 모든 것들이 은폐되거나 왜곡된다. 따라서 누군가의 삶에 대해서, 어떠한 사건에 대해서 다룬다는 것은 이 모든 세부를 진심 어린 마음과 과학자의 태도를 갖고서 충분히 검토될 때 비로소 보다 명료한 이해에 다다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해에 다다르도록 만드는 동력이 ‘지성’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지성을 소유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확신에 차 있기보다는 말하기를 주저주저한다. 그리고 ‘…일지도 모른다’, ‘이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생각 중이다’, ‘아닐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지성의 작동이라고 생각한다. 판단을 유보하고 세부를 살피는 사람들을 만나면 존귀한 마음이 올라오기까지 한다. 한편으로는 세부적인 시선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아름답고 멋진 결과보다 그 과정에 있었던 작은 일들을, 누군가 일상적으로 수행해낸 일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도록 만든 잘못된 구조와 관습의 윤곽이 보일 것이다. 

거대한 파도와 같은 담론들이 2020년 현대인의 일상을 뒤덮고 있다. 코로나19가 그렇고 기후위기가 그러하다. 이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는 노동자들의 삶의 문제 역시 다층적이고 복잡하다. 코로나19는 이미 일상을 바꾸고 있다. 기후위기는 에너지, 교통, 도시계획, 식량보급처럼 탄소배출에 기대고 있는 현대문명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때 우린 또다시 박수칠 준비만 하고 저 위대한 힘을 가진 정치인이나 과학기술을 기다려야 할까. 

말 그대로 큰일이 났다. (특히 기후위기에 관해서는) 원대한 꿈을 가진 국가 원수와 초국적 기업인들이 큰일을 벌이면서 이산화탄소를 마구마구 배출한 탓에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물론 그들이 만든 해외관광산업, 자동차산업, 편리한 배송 시스템, 육식 중심의 식문화에 익숙하게 스며든 사람들 역시 한 몫했다. 이런 거대한 문제는 바라보고만 있어도 현기증이 나고 이내 무기력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어쩌면 이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작지만 소중한 일상으로, 지역으로, 동네로 돌아와야 할 때가 되었는지 모른다. 세계일주라는 꿈을 접고 걸어서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내 곁에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손에 잡히는 작은 일들이 무엇이 있을까 상상해보고 움직여보기로 한다. 각자의 몫을 갖고서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고, 서로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을까 고민해보기로 한다.

수억만 개의 빛깔을 가진 햇살이 창문을 두드린다. 창문을 연다. 햇살들이 한점한점 날아와 박힌다. 부디 은혜롭길 기도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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