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영화 <맨 인 블랙>의 엔딩이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바깥으로 카메라 앵글을 무한히 확장시키고 나니 우주가 사실은 장난감 구슬에 불과했다던 씬. 그 장면은 당시 내게 굉장한 쇼크였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의 전부인 것 같은 초등학생 때는 내 세상이 먼지보다도 작은 것처럼 여겨지는 게 용납이 안됐던 것 같기도 하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로 알려져 있는 이 말은 델포이(Delphoe)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 적힌 말이라고 한다. 고등학생 시절 이과였던 나는 학사 과정에 윤리 과목이 없어 안 배웠는데, 최근에 그 말에 담겨있는 속뜻을 알려준 이의 목소리가 머리를 때렸다. 그 뜻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란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섬찟함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저항하며 부르짖었던 내 목소리 모두가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가 된 수준을 넘어서 한없이 쪼그라들어 마치 무(無)에 수렴해 가는 듯한 수준의 감각이었다.

내가 비록 귀신은 아니지만, 빙의(憑依)를 하는 기분으로 타인의 삶을 상상해본다. 대단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세대도, 성별도, 발 사이즈도, 전문 지식도, 경험과 가치관도, 지인과 관계를 맺는 방법도, 하다 못해 좋아하는 책과 영화도, 편안함을 느끼는 조도(照度)까지.. 모든 게 다른 타인의 삶을 상상한다는 건 불가능이다. 이쯤 되니 슬픈 영화를 보고 주인공에 감정 이입해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하며 울었던 내가, 내가 맞나 싶다.

선호하는 인물을 상상하면 그나마 ‘이건 불가능하구나’한다. 하지만 선호하지 않는 인물들, 예를 들면 이해 가지 않는 정책을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부지런히 펼치는 어떤 정치인이나,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니, 너도 그렇게 살아야지’라고 노멀한 형태의 삶을 강요하는 선량한 사람의 삶에 빙의하려 시도하면 맞지 않는 주파수가 마음속에서 마구 충돌하며 스파크가 일어난다. 마침내는 편두통까지 날 지경이다. 

흔히 내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하는 모든 말과 주장은 '여보시오, 나 같은 사람을 이해하고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시오'라며 나도 못하는 것을 강요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얼마나 오만했던가.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하나의 삶이 모두 각자의 우주라는 것을 어느 날 갑자기 체감했노라 고백한 친구가 있었다.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감각으로 받아들여졌다며, 이 이상 설명하지 못하겠다고 웃음을 지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속뜻에서 시작한 나의 무지(無智)함을 헤집는 고뇌 속에서 잊고 있던 그 친구의 웃음이 생각났다. 네가 했던 말이 이 말이었을까. 그때는 알 것 같았던 그 말도 이젠 모르겠구나.

나는 6.25 전쟁의 참혹함을 모른다. 빨갱이를 향한 분노를 모른다. 민주화 운동의 피 흘리는 절박함을 모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의 고단함을 모른다. 지킬 것이 많은 이가 부리는 욕심을 모른다. 후손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리라 이 악무는 독기를 모른다. 

이런 내가 주로 분노하는 대상들은 대체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중·노년세대인데, 이들은 대체로 (혹은 절대로) 청년·청소년 세대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적 무력감을 모르고, 이들에게 싸가지라는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큰 폭력인지 모른다. 내게서 끓어올랐던 분노들은 서로를 모르기에, 아무것도 몰랐기에, 모름에서 근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무도 서로를 모른다. 그래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 나는 오로지 ‘나’이며, 너는 오로지 ‘너’이다. 내 말은 다른 이가 대변할 수 없다. 그래서 내 철학을 담은 언어는 소중한다. 내가 이해한 당신은 당신의 얼마나 일부이며, 얼마나 전부인지 모른다. 그래서 당신의 진심은 소중하다. 이렇게 서로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가 만남과 갈등을 통해 희로애락이라는 컬러로 채색한 세상 밖에선 사회라는 우주를 가지고 누군가 구슬놀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먼지보다도 작은, 소중한 우리를 가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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