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이 흔히 ‘월화수목금금금’이라며 한 주를 표현하는데 요즘 저와 우리 아이들의 일상은 ‘토토토토일일일’인 일상이 되었습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로 모든 대외활동이 멈추었기 때문이죠. 조금 불편해도, 힘들어도 괜찮으니 모두가 무탈하게 이 시기를 견뎌 내길 바랄 뿐입니다.

놀 시간이 너무 많아지니 아이들이 시키지 않아도 책을 읽네요. 자기들도 너무 심심하니까요. 놀다 지치면 만화책을 꺼내 읽다가 그것도 지겨우면 그림책도 읽다가 그래도 지겨우니 읽었던 책을 또 읽고, 남의 떡이 커 보이는지 남이 읽던 책으로 바꿔 읽고 하네요.

저도 이때다 싶어 소장하고 싶던 책들을 ‘도서관도 쉰다’는 핑계로 열심히 장바구니에 담아 우리집으로 초대합니다. 지금 시기에 얼마나 반가운 손님들인지…

장바구니에 담겨 우리집에 온 손님들.
장바구니에 담겨 우리집에 온 손님들.

모두가 조심스러워 만나기 힘든 이 시기에 다양한 복장을 한 여러시대 책 속 주인공들이 우리집 현관문을 열며 들어오는 것 같은 마음에 택배 상자를 열 때마다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한답니다.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오히려 만남과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게 되네요.

만남에는 목적과 의무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지요.

책을 함께 읽는 독서 모임, 함께 공부하는 공부 모임, 함께 운동하는 운동 모임, 자녀들 같은 반 학부모 모임, 동네 친목 모임, 회사 친목 모임.

모두 본인이 원하는 공통분모를 하나씩 갖고 모여 각자가 가진 목적을 함께 달성해 나가기 위해 해야 하는 의무를 해 나갑니다. 의무가 부담스러워지거나 목적이 달라지면 모임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시들시들해집니다. 그러다가 조용히 모임에서 빠져나오게 되죠

그 와중에 모임의 목적과 의무와는 관계없이 친해지는 사람이 생기기도 합니다. 모임과는 상관없이 나와 공통분모를 갖게 되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과 또 다른 만남을 지속해 나가지요.

목적과 의무가 동반되지 않아도 계속 만나고 싶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마음을 열고 지내게 되면 우리는 서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최고의 친밀감을 선물하게 됩니다. 때문에 ‘그냥 아는 사람’이라는 호칭과 ‘내 친구’라는 호칭 사이에는 짧은 시간에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수 많은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냥 아는 사람’은 아직 쓰이지 않은 떠도는 상념들에 불과하다면 ‘내 친구’라는 호칭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서로 나눈 이야기와 함께 겪은 일들이 머릿속에서 한 권의 책으로도 쓰일 수 있을 만큼 담겨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누군가와는 짧은 단편집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와는 장편 서사시가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완결판으로 이미 끝이 나기도 했고, 때로는 완결판인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다시 만나 후속편을 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머릿속이야 말로 엄청나게 많은 책이 쌓여 있는 서고가 아닐까요?

책벌래. 카를 슈피츠베그(1808~1885)
책벌래. 카를 슈피츠베그(1808~1885)

벽돌 깨기 기사단 모임에서는 한 주 동안 같은 구간의 책을 읽고 가장 인상적인 구절을 각자 골라옵니다. 그리고 그 구절이 왜 기억에 남았는지 공유를 하지요. 각자 마음속 도서관에 담긴 기억과 삶의 흔적이 달라 마음에 남는 구절도 다릅니다. 나에게는 별 감흥이 없던 구절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한 조각을 들추어 보게 해 준 시간여행의 열쇠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동일한 구절이 함께 기억에 남았지만 그 이유가 가지각색이기도 합니다.

물론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에는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고, 돈키호테를 통해 개인의 삶의 역사가 공유될 때에는 더욱 귀기울여 듣고 함께 공감하게 되지요. 그렇게 서로 ‘타인’이었던 사람들이 벽을 허물고 자연스럽게 ‘지인’이 되고 ‘동인’이 되고 ‘친구’가 되어갑니다.

돈키호테의 모험 속에도 그런 만남들이 끊임없이 펼쳐집니다.

대부분의 경우가 상대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돈키호테가 스스로 세워 둔 목적과 의무에 빠져 서로가 예상치 못하는 상황으로 흘러가기는 합니다.

산초와 처음 겪은 풍차 모험처럼 어떤 형상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돈키호테의 머릿속에는 기사소설 한 구절의 상황이랑 겹쳐 보이면서 자신의 역할과 상대의 상황을 이미 정해버리고 돌진하기 때문이죠. 돈키호테 본인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기사, 상대 중 누군가는 구해줘야 할 대상, 누군가는 싸워 이겨야 하는 악당…이렇게 말이죠.

돈키호테의 이 무모함을 매우 어이없어 하며 읽었지만 사실 지금 저도 때로는 돈키호테의 그것과 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려보곤 합니다.

누군가는 돈키호테와 만남으로서 자신의 상황이 더 악화되기도 하고, 누구는 돈키호테의 무모함에 화가 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두들겨 패주기만 하기도 합니다. 또 누군가는 돈키호테보다 더 어이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때론 돈키호테가 조금 모자란 것을 눈치채고 부러 골탕을 먹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돈키호테의 말에 귀기울여 속마음을 서로 털어놓고 풍족하지 않은 음식을 서로 나눠 먹으며 온기를 나누는 만남도 있었답니다.

기사단들이 고른 돈키호테가 경험한 만남들을 소개해드릴게요.

 

하나. 잘못된 만남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그림. 1863년 프랑스판 돈키호테의 삽화.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그림. 1863년 프랑스판 돈키호테의 삽화.

돈키호테는 여자의 손목을 꽉 잡고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자기 앞으로 끌어다 침대에 앉혔다. 그러고 나서 여자의 속옷을 더듬었다. 그것은 거친 싸구려 삼베로 된 것이었으나 그에게는 아주 질이 좋은 얇은 비단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손목에 유리로 된 염주를 끼고 있었으나 그에게는 동양의 귀한 진주로 여겨졌다. 머리카락은 어떻게 보면 말갈기 같았으나 그에게는 태양도 어둡게 만드는 아라비아의 빛나는 황금 실타래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내뿜는 숨결은 저녁에 만들어 하룻밤을 넘긴 샐러드 냄새를 풍겼으나 그에게는 부드러운 향내 같았다. 한마디로 그는 자기가 책에서 읽은 공주로 그녀를 상상했다.

이 부분을 고른 기사단의 소감
이 부분을 고른 기사단의 소감.

이 부분을 읽으며 얼마나 배꼽을 잡았던지요. 더군다나 이 부분을 고른 분이 가장 젊고 꽃다운 나이의 기사님이라 모두 그 분의 연애사도 이랬냐며 유도심문을 해댔지요. 그 순간 모두 사춘기시절로 돌아간 듯 까르르 웃어 댔답니다.

돈키호테가 모험 중 들르게 된 객주에서 하룻밤 머물게 된 날 밤 벌어진 일입니다. 이 객주는 이야기 속에서 참 많은 사연을 갖게 되는데요. 객줏집 일하는 처녀 마리토르네스가 돈키호테와 같은 층에 머물게 된 어느 마부와 눈이 맞아 밤에 만날 약속을 했는데요. 그날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마부의 침대가 아닌 돈키호테의 침대로 잘못 찾아가게 되며 잘못된 만남을 갖게 됩니다. 온갖 망상에 사로잡혀 있던 돈키호테는 이 여인이 공주님이며 자기한테 반해 사랑에 빠져 그를 찾아왔다고 착각하게 되지요.

처녀를 기다리고 있던 마부가 건너편에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알게 되고 돈키호테 침대로 가 그의 턱을 사정없이 갈겨버립니다. 급작스러운 소란에 객줏집 주인도 들이닥치게 되고 잠이 덜 깬 산초는 악몽을 꾸는 줄 알고 사방팔방 주먹을 날리게 됩니다. 그 주먹에 마리토르네스가 몇 대 맞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는데요. 마부는 산초에게, 산초는 하녀에게, 하녀는 산초에게, 객줏집 주인은 하녀에게, 모두 숨 돌릴 틈도 없이 서로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는 슬픈 사연이…

 

둘. 허무한 만남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그림. 1863년 프랑스판 돈키호테의 삽화.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그림. 1863년 프랑스판 돈키호테의 삽화.

그렇게 또다시 1백 걸음쯤 걸어갔을까, 모퉁이를 돌자 그 무서운 소리의 원인이 만천하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밤새도록 그들을 그토록 긴장시키고 무서움에 떨게 했던, 그들이 보기에는 굉장하게 울려 퍼졌던 소리의 원인은 – 오, 독자여! 부디 실망하시거나 화내지 않으시길! – 바로 물통에 있는 빨래의 기름때를 돌아가며 두들겨서 빼는 여섯 개의 방망이었다. 그것들이 번갈아 내리치면서 그런 굉장한 소리를 냈던 것이다.

이 부분을 고른 기사단의 소감.
이 부분을 고른 기사단의 소감.

적막한 산속에 쇠사슬이 마찰하며 무언가에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돈키호테와 산초의 마음에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를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돈키호테는 무찔러야 할 대상이라 생각하고 당장 창을 들고 출동하려고 했지요. 혼자 남겨질 산초는 두려움에 떨며 어떻게든 날이 밝으면 가자며 돈키호테를 말리고 있었구요. 험한 산중에 혼자 남지 않으려는 산초의 이 노력은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세르반테스 작가님은 장장 14페이지나 되는 분량을 이 두려운 소리를 당장이라도 따라가 처단하겠다는 돈키호테와 무서워 벌벌 떨며 돈키호테를 말리느라 똥까지 지리는 산초를 묘사하는데 쓰셨답니다.

그리고 나서 펼쳐지는 이 반전의 허무함. 너무 허무해할까 봐 독자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시는 센스까지… 수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독자들을 정말로 들었다 놨다 하십니다.

 

셋. 위험한 만남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그림. 1863년 프랑스판 돈키호테의 삽화.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 그림. 1863년 프랑스판 돈키호테의 삽화.

“이 친구는 고문을 이겨낼 용기가 부족했고, 저 친구는 돈이 부족했고, 저 친구는 도와줄 사람이없었고, 결국 판관의 비뚤어진 판단이 파멸의 원인으로 그대들은 정당한 판결을 받지 못한 것이오. 지금 그대들이 말 한 모든 것들이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나를 설득하고 강요까지 하면서 명령하고 있소. 하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 기사도에 내 몸을 바치게 하신 목적,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힘 있는 자로부터 억압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기사도의 맹세를 지금 그대들을 위해 발휘하라고 말이오. 그러니 호송하는 분들과 관리분에게 이 분들의 포박을 끌러 편하게 가게 내버려 두라고 부탁드리고 싶소"

이 부분을 고른 기사단의 소감.
이 부분을 고른 기사단의 소감.

원작 속에서 돈키호테는 매번 망상에 빠져 엉뚱한 곳에 창을 들고 돌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상 누구보다 옳은 말을 하는 제대로 된 기사의 모습을 보여줘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합니다.

죄를 짓고 배에서 노 젓는 형을 받아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사연을 묻고 하나하나 귀기울여 듣는 돈키호테와 산초. 안타까운 사람들의 사연에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 놓겠다고 할 만큼 선의를 베풀려고도 하지요.

아무리 품위 있게 죄인들을 풀어 달라 얘기했다 한들 호송원과 죄인들이 보기에 돈키호테는 약간 맛이 간 노인네일 따름이었나 봅니다. 돈키호테의 용기로 호송원들과의 난리 끝에 죄인들이 쇠사슬에서 풀려나자 마자 돈키호테는 어느때와 다름없이 <둘시네아 델 토보소>귀부인에게 가서 자신의 업적과 영광을 전하라고 명령하지요.

풀려난 죄인들은 어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큰 나머지 엉뚱한 요구를 하는 돈키호테와 산초의 은혜를 돌팔매와 매질로 갚는 답니다. 심지어 속옷만 빼고 갖고 있던 모든 물건을 다 빼앗아 가는 치욕까지 덤으로 주지요. 목숨을 걸고 죄인들을 구한 돈키호테와 산초에게 남은 건 쓰라린 상처와 돌에 맞아 쓰러진 로시난테 뿐이었답니다.

함께 이 부분을 읽으며 기사단원들은 조금 혼란스러웠습니다.

뭔가 찜찜한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억울한 시대상황과 군중들의 목소리를 들어준 돈키호테가 맞이하는 대가로 너무 혹독했으니까요. 위험을 무릅쓰고 정의를 실현한 돈키호테에게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을까 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 기사단 중에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제 마음에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돈키호테가 영웅적 주인공이 되어 권선징악과 같은 어떠한 교훈과 메시지를 전하려는 게 아니라 살면서 누군가는 겪을 수 있는 상황을 들려주고 그 상황의 중심 또는 주변에 돈키호테가 머무르게 하며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당신 생각은 어때?’ 하고 슬쩍 물어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돈키호테는 책 곳곳에서 매우 이상적인 소리는 하지만 위대한 사람으로 추켜올려지지 않거든요. 혼자서는 풀리지 않았던 실마리가 함께 읽으니 이렇게 현답을 찾을 수 있었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흘러 이제 책의 한 3분의 1이 지났습니다. 일상의 만남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어 돈키호테가 만난 여럿 만남 중 세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렸네요. 풍차 모험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으신가요? 여러분께서 상상했던 모험들이었는지 모르겠네요.

앞으로 또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 들고 다시 찾아 뵐게요. 모두 모두 무탈하시길!

 

추신.

오늘은 돈키호테와 산초의 대사 중 명언들을 몇 개 선물로 드리고 갈게요.

“세월과 함께 잊히지 않는 기억은 없고,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는 고통은 없다는 걸세.”

“운이라는 것은 불행 속에서도 빠져나갈 문을 항상 열어 놓지. 불행을 해결하라고 말 일세.”

“내가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자랑하는 자는 자신을 천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지요.”

“자네의 잘못은 나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나의 실수는 좀 더 존경받을 짓을 못 했다는 것 일세.”

“사람이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그를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네.”

-이상주의 돈키호테의 명언-

 

물러나는 것은 달아나는 것이 아니며, 위험이 희망을 앞지를 때 그저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분별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요. 지혜로운 자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삼갈 줄 알고, 하루에 모든 것을 모험하지 않습니다요. 저는 촌것에 천한 놈이긴 하지만요. 사람들이 말하는 처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아직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쇼.”

-현실주의 산초의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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