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생활에 만족하지만 진로나 진학은 잘 몰라
고려인 아이들끼리 커뮤니티 형성해 교류하기도
한국생활 발판삼아 더 나은 세상 경험하고 싶어

<고려인 아이들 보고서 1>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 이후 80여년.

고난의 삶을 견디고 이겨낸 조선 민초들의 후예들이 최근 청주로 오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또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고려인 3·4세들은 가족단위로 청주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청주시 봉명동과 복대동, 사창동, 사천동 등에 거주하며 청주산단 내 제조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다.

가족단위 이주다 보니 2~3세 어린아이부터 중·고등 청소년도 있다. 아이들은 청주에서 주로 다문화 정책학교 등을 다니고 있다.

엄마 아빠를 따라 청주를 찾은 고려인 3·4세 아이들.

실제 이 아이들은 청주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조선인 뿌리를 지니고 있지만 여전히 스스로를 외국인이라고 말하는 고려인 아이들. 이들의 일상은 어떤지, 지역주민 및 지자체 지원은 어떤 것이 있는지 2차례에 걸쳐 알아본다.

 

고려인 아이들 점점 늘어

현재 충북의 다문화 정책학교는 청주의 봉명초, 한벌초, 경덕중, 서경중, 충주의 충주중앙중, 제천의 남당초, 진천의 진천삼수초, 음성의 대소초, 무극중 등 9개교다.

충북도교육청에 따르면 봉명초, 한벌초, 서경중, 경덕중, 남당초에 다니고 있는 고려인 아이들은 250여명 가량이고 이들 중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동안 이주해온 학생은 160여명에 달한다.

 

 

이들은 이주 첫 6개월 동안 오전시간을 할애해 한국어 교육을 받는다. 도교육청 한 관계자는 "중도입국 학생 또는 외국인학생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 교육을 집중적으로 하고 있고 이들을 고려한 교육프로그램을 편성해 운영하고 있다"며 "다문화교육 정책학교는 매년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7, 8살 나이에 엄마 아빠를 따라 청주에 온 고려인 아이들을 보기 위해 다문화교육 정책학교인 봉명초등학교를 찾았다.

7월 24일 오전 11시.

방학기간이지만 봉명초등학교 1, 2학년에 재학 중인 고려인 아이들 10여명이 모여 한글공부를 하고 있다. 충북대학교 대학생 5~6명이 우리나라 4, 5세 정도의 아이들이 배울만한 내용을 게임형식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선 대학생들이 수박, 참외, 사과, 복숭아 등 과일그림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손을 들어 한국어로 말을 한다. 문제를 맞추면 젤리를 준다.

누가 얼마나, 많은 젤리를 받았나 경쟁이라도 하듯 대학생들 질문에 먼저 답하려고 손을 번쩍번쩍 든다.

봉명초등학교 1, 2학년에 재학 중인 고려인 아이들 10여명이 모여 한글공부를 하고 있다.
봉명초등학교 1, 2학년에 재학 중인 고려인 아이들 10여명이 모여 한글공부를 하고 있다.
한 아이가 또박또박 한글을 쓰고 있다.
한 아이가 또박또박 한글을 쓰고 있다.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은 편차가 꽤 커보였다.

대학생들 질문과 과제에 또박또박 답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글씨를 쓰라고 하는데 색칠을 하는 등 엉뚱한 행동을 하는 아이도 있다. 또 질문을 해도 못들은 듯 대답을 하지 않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친구와 장난치고 깔깔대며 웃는 모습, 한국말을 못한다는 것만 빼면 한국 아이들과 다른 점은 없었다.

 

“한국말, 너무 어려워요”

청주시 서원구 사직동에 있는 충인태권도.

충인태권도에는 다른 태권도 학원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러시아 말을 할 줄 아는 러시아 국적의 사범이 있다는 것.

러시아에서 태권도 선수로도 활동한 경험이 있는 한올래그 씨. 그는 이곳에서 프리랜서 신분으로 러시아 국적의 아이들 40여명을 1년 째 지도하고 있다.

인근 태권도장에서 지도받던 고려인 아이들은 충인태권도에 러시아 말을 할 줄 아는 사범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1년 전 5~6명에서 현재 40여명으로 늘었다.

충인태권도에서 한올래그 씨로부터 태권도를 배운다는 고려인 아이들을 만났다.

왼쪽부터 김 소피아, 한올래그, 김 알렉세이, 최 크리스티나
(왼쪽부터)김 소피아, 한올래그, 김 알렉세이, 최 크리스티나가 태권도 포즈를 취하고 있다.

 

1년 전 러시아 모스코바에서 청주로 온 김 소피아(청주여중 2).

김 소피아는 선생님 말이나, 학교공부가 너무 어렵다며 말문을 연다.

“학교요? 너무 어려워요. 특히 수학은……”

다문화 정책학교인 경덕중학교에 빈 자리가 없어 청주여중을 다니고 있다는 김 소피아 양은 학교생활에 문제는 없지만 한국말이 너무 어렵다고 토로한다.

음악을 배우고 싶고, 가수도 되고 싶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도 말한다. 고등학교 진학계획을 묻자 “잘 모르겠어요. 엄마랑 얘기해 본적 없어요”라며 말끝을 흐린다. 인문계고등학교, 특성화고등학교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청주에 온지 2년 정도 된 최 크리스티나(경덕중 2).

김 소피아와 마찬가지로 충인태권도 엘리트 반인 최 크리스티나는 태권도 배우는 것에 매우 만족해한다.

“학교 내에 동아리가 있지만 재미가 없어서 참가하지 않아요. 태권도가 훨씬 재밌어요.”

태권도 학원에서 만난 김 소피아와 최 크리스티나는 둘도 없는 친구다. 나이 뿐 아니라 운동을 좋아하는 것도 같고 무엇보다 대화가 통하기 때문이다.

한국 TV는 보지 않고 유튜브를 검색하거나 인스타그램이나 메신저로 청주에 있는 러시아 아이들과 교류한다.

“메신저에는 한 60명 정도 참여하고 있어요. 학교에서 있었던 일도 서로 이야기하고 화났던 일, 재밌었던 일을 얘기해요.”

지금은 방학이라 하루일과 대부분의 시간을 태권도 학원에서 보낸다. 오후 1, 2시에 일어나 학원에 왔다가 밤 9시경에 집에 간다고.

충인태권도 강성민 관장은 “이 아이들은 방학 때 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밖에서 만나는거 같지도 않고. 그렇다보니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는 생활이 반복돼요”라고 말했다.

현재 생활에는 만족하지만 미래를 계획하거나 새로운 활동을 하기는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어느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니?"라는 질문을 했다. 아이들은 "당연히 우즈베키스탄 사람이고 러시아 사람이죠!"라고 말했다.

유치원 다닐 때 청주로 왔다는 우즈베키스탄 국적의 김 알렉세이(한벌초 6).

얼핏 봐서 한국아이와 전혀 차이점이 없는, 잘 웃고 장난하기 좋아하는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다.

김 알렉세이는 김 소피아나 최 크리스티나와는 좀 다르다.

“청주에 온지는 한 6~7년 된 것 같아요. 유치원 때 왔는데 그때는 기억이 않나요. 지금 학교는 재밌어요. 수업하는 것도 괜찮고 공부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

김 알렉세이는 저학년 때 한국말이 어려워 답답해했던 기억을 빼면 우즈베키스탄 사람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전혀 없다고 말한다.

한국 아이들과도 친하고, 밥 먹고, 노는 것도 문제가 없다. 태권도 학원이외에 영어 과외를 통해 영어공부도 한다. 러시아 말과 한국말을 능수능란하게 하는 김 알렉세이는 앞으로 과학자나 태권도 선수가 되고 싶단다.

 

“한국과 우즈베키스탄 우호적 관계 위해 일하고 싶어요”

진로와 진학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10대 후반 나이에 한국을 찾는 고려인 청소년들도 있다.

이들은 대학입시에서 외국인 전형이라는 큰 메리트를 갖고 한국생활을 발판삼아 좀더 ‘넓은 세상’에 나갈 준비도 하고 있다.

2016년 18살 나이로 우즈베키스탄에서 청주에 온 박 스타스(사대부고 3).

우즈베키스탄 컴퓨터 전문학교인 TPCIT 1학년을 다니던 박 스타스는 엄마의 권유로 2016년 9월 경덕중학교 3학년에 입학했다.

엄마는 우즈베키스탄 정부에 기댈 것이 없다며 한국행을 권했고 딱히 목표가 없었던 박 스타스는 엄마의 일터가 있는 청주로 왔다.

처음 6개월, 예상대로 경덕중학교 3학년 시절은 박 스타스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일단 한국말을 전혀 할 수가 없었고 친구가 단 한명도 없었다고.

“너무 외로웠고 정말 힘들었어요.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죠.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번만 다시 해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후회할 것 같았거든요.”

중 3과 고 1시절에는 공부에 손을 놓았었다. 놓고 싶어서 놓은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고향에서는 전교 1, 2등 하던 '수재'였는데 ‘꼴찌’라니. 견디기 힘들었다.

우선 한국어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유튜브를 보거나 책을 통해서 혼자 독학으로 배웠다. 지금은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다. 뿐만 아니라 한글 글짓기에도 도전하고 있다.

고 3인만큼 요즘은 수시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통상학과 입학을 희망하는 박 스타스는 고향인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의 국제관계 개선에 일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우즈베키스탄도 살기 힘든 곳이지만 한국도 살기 좋은 곳은 아닌거 같아요. 미세먼지나 환경오염이 너무 심해요. 우선 대학에 입학하면 세계여행을 다녀볼 생각이에요. 여행을 하면서 내가 살 곳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무슨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을지 고민해볼 계획입니다.”

사진 촬영은 극구 사양하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당당히 밝히는 박 스타스.

그는 한국에서 받은 혜택에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는다.

“앞으로 나처럼 외국인이면서 힘든 생활을 하는 후배가 있다면 도와주고 싶어요.”

청주새날학교 곽만근 교장
청주새날학교 곽만근 교장

자신의 진로를 야무지게 준비하는 박 스타스와 같은 청소년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청소년도 상당수 있음을 취재결과 알 수 있었다.

고려인 아이들을 위한 대안교육기관 ‘청주새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곽만근 교장은 안타까운 사연이라며 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17살 된 여학생이었는데 스마트폰 게임에 중독된거 같았어요,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못하게 했더니 자신의 팔을 물어 뜯어 철철 흐르는 피를 교실 벽에 묻히고 고함을 막 지르는 친구가 있었어요. 대화도 안 되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인권말살' 자체였던, 1937년 강제이주정책을 견디고 살아남은 고려인들의 후예들은 이렇게 우리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같은 민족이냐 아니냐를 떠나 이미 이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이 된 것이다.

<고려인 아이들 보고서2>에서는 이들을 위한 지역주민 및 지자체 지원과 역할에 대해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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