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장 직급 상향·학예사 정규직화 과제

개방형 공모를 임명된 청주시립미술관장이 임기 만료 8개월을 앞두고 돌연 사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해 1월 취임한 홍명섭 관장(70)은 4월말 청주시에 직접 사퇴서를 제출하고 외부 연락을 끊은 채 출근을 하지 않고 있다. 취재 결과 한범덕 시장은 사퇴한 홍 관장은 물론 시장실을 방문한 미술관 운영위원들과도 면담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지역미술계에서는 '눈밖에 난 사람'을 내쳤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한 시장의 독선적인 인사방식이 도마위에 오르게 됐다. <편집자 주>

청주시는 2018년 1월 '개방형 공모제'를 통해 홍명섭 청주시립미술관장을 임명했다. 시립미술관은 2016년 7월 개관이후 2명의 관장을 5급 공무원으로 임명했다. 지역 미술계의 지속적인 요청에 따라 결국 1년반만에 이승훈 전 시장은 공모를 통해 미술전문가를 선임한 것이다. 지역 원로 미술인을 비롯한 10여명의 신청자가 몰렸으나 뜻밖에(?) 홍 관장이 선정됐다. 일부에서는 "지역 출신 특정인사를 선임할 경우 뒷말이 나올 소지가 크다보니 아예 외지 출신을 선택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홍 관장, 관리직-학예직 갈등조정 한계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한성대 미대교수로 퇴임한 홍 관장은 부인과 함께 청주에 거처를 마련하는 등 남다른 의욕을 보였다. 지역 원로작가 회고전과 중견작가 특별전 등을 통해 지역 공공미술관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기획에 주력했다. 홍 관장이 학예팀을 중심으로 전시 컨텐츠 분야에 전념하면서 관리팀에서 불만이 커졌다는 후문이다. 관리팀의 불만은 본청 문화체육국A국장(4급)에게 전달됐고 상급자인 국장이 홍 관장(5급)에게 조직관리에 대해 주문하는 입장이 됐다. 이 과정에서 국장과 관장 사이에 틈이 벌어졌고 무엇보다도 학예직과 관리직의 뿌리깊은 갈등을 조정하는데 한계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최근 <중부매일>에 보도된 홍 관장의 사퇴서에 따르면  "학예직이 임기제라는 약점을 잡아 (관리직이) 비인간적 망언과 협박, 굴욕적 폭언으로 괴롭혀 더는 용서할 수 없어 감사팀과 국장에게 진정도 했다. 그러나 (국장의)돌아온 반응은 관장의 학예직에 대한 편애가 불화를 일으킨 사태처럼 간주되고 말았다. 본인은 이 지역 미술계와 시립미술관의 장래를 위한 최후의 수단은 사직으로 밖에 달리 경고할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고 토로했다.

홍명섭 관장

이에대해 A국장은 "미술관은 전시업무를 중심으로 시설관리, 인력운용 등의 업무가 수반된다. 기관장은 양쪽을 균형있게 챙겨야 하는데 한쪽에 너무 치우쳤다는 내부 불만이 제기됐다. 내부 불만을 기관장이 잘 관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무국장으로서 의견을 전달했을 뿐이다. 이쪽에선 자연스런 업무협의였는데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지난 4월말 홍 관장은 친분있는 지역 미술인 모씨에게 사퇴의사를 밝혔고 모씨는 시청 A국장에게 알려줬다.  A국장이 곧바로 연락을 취했으나 홍 관장은 전화를 받지 않고 직접 시장실을 방문해 사퇴서를 제출하려 했다. 하지만 부속실 직원이 "여기서 접수할 수 없으니 인사부서에 제출하라"고 돌려보냈다는 것. 결국 청주시립미술관의 미술전문가 공모 1호 관장이 시장 면담 한번 없이 인사부서에 사직서를 내고 출근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공모 관장의 중도 사퇴라는 엄중한 사태를 맞아 청주시립미술관 운영위원회 위원 8명은 지난 3일 청주시장실을 방문했다. 하지만 시장부속실 직원들은 "사전 약속이 없었다"며 후속 일정을 이유로 면담을 거절했다. A국장과 모 위원의 사전협의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시장실 일정을 잡지 않은 것.  이에대해 운영위 부위원장은 "사전 약속에 문제가 있었다 치더라도 시립미술관의 위기상황에 대해 운영위원들이 대화하자며 찾아간 자리인데 어떻게 그냥 돌려보낼 수가 있는가? 참담한 심정으로 위원들이 시청 인근 커피점에 자리를 잡았고 배석한 A국장에게 '이런 상황에서 운영위원들이 직을 유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며 집단사퇴 의사를 전했다"고 말했다.

청주시장, 당사자-운영위원 면담 안해 논란

운영위원들이 집단사퇴 배수진을 치자 A국장은 "홍 관장님이 사퇴서를 반려하고 원대복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아울러 A국장이 직접 청주시 내수읍 홍 관장의 자택을 방문해 부인을 만나 사퇴번복을 설득했다는 것. 당시 홍 관장은 부재중이었고 현재 취재기자는 물론 운영위원들의 전화도 받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홍 관장의 사퇴 의사가 번복될 가능성은 없다는 게 중론이다.

지역 미술계 관계자는 "청주시립미술관장은 사실상 4개 미술관(대청호, 오창, 미술창작스튜디오) 운영을 총괄하는 자리다. 기획력 못지않게 조직 관리 능력이 필요한데 홍 관장은 대학 강의와 작품활동에 주력해온 분이다. 관리팀과 학예팀의 갈등조정이 어려웠고 운영위원들과의 소통도 원활치 못했던 것 같다. 결국 대쪽같은 성격의 홍 관장이 자신을 던져 청주시에 엄중 경고를 하고 물러난 셈"이라고 말했다. 

한편 청주시는 홍 관장의 연가 사용 시한인 15일까지 복귀의사를 밝히지 않을 경우 관장 재공모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재공모시 자격요건의 경력기준에 공무원을 제외시켜 신청 기회조차 주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대해 시 관계자는 "미술관장직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해 개방형 취지에 맞게 공무원 출신은 아예 배제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특히 현직 관장이 자진 사퇴로 물러난 마당에 공무원 출신에게 문호를 열 경우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판단도 했다"고 말했다.

미술관장 직급 상향, 학예사 정규직화 필요성 제기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지역 문화예술계 안팎의 분위기는 착잡하다. 특히 시립미술관장의 자진 사퇴라는 최악의 상황을 궁금해 하는 다른 지역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는 것. 지역 미술단체 관계자는 "미술계의 전국적인 이슈가 됐고 망신거리가 됐다. 개방형 공모로 모신 사람을 이런 식으로 떠나보내는 것은 임명권자의 실책이다. 사퇴서를 들고 시장실로 갔다가 퇴짜맞고 인사부서에 제출했을 때 그때라도 시장이 한번 불렀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시장실로 찾아간 운영위원들도 만나지 않은 것은 결국 '눈밖에 난 사람' 하루빨리 내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분들이 선뜻 관장 재공모에 응할 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지역 미술계에서는 이번 기회에 시립미술관장 직급 상향 조정과 학예사 정규직화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전국 시립미술관의 경우 대부분 3~4급 관장을 임명하고 있다. 청주시 규모로 볼때 미술관장은 4급 국장급(서기관)으로 선임해야 관료체제에 휘둘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미술관의 꽃'인 학예사의 경우 시립미술관은 6명의 학예연구사가 모두 비정규직(5년 계약직)이다. 분관이 1개인 대전시립미술관은 학예사가 9명이고 그 중 2명이 정규직이다. 지역 미술인들은 "미술관의 작품 구매 관리, 장기 전시 계획 등을 감안하면 평생 직장 개념의 정규직 학예사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청주시측은 "정규직 전환시 공채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기존 계약직 신분의 학예사들이 부담을 느껴 그들의 입장을 감안한 결과"라고 말했다. 그러나 취재진이 만난 시립미술관 학예사의 얘기는 달랐다. "우리가 정규직 전환을 반대한 적이 없다. 시험을 치를 경우 준비된 사람들이 응시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관리팀과의 업무협의를 위해서도 정규직 학예사는 필요하다는 것이 공통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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