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악의 유혹이 없을 수 없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이 보잘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루가 17, 1-4)

절대적인 선善은 무엇인가? 혹은 절대적인 악惡은 무엇인가? 우리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진리라는 것 또한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행복은 무엇이고, 불행은 무엇인가? 무엇이 행복의 기준이 되는 것이고, 무엇이 그 기준에서 일탈逸脫된 불행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아름다움은 또 무엇인가? 어떤 형상을 지녀야 우리는 아름답다고 불러줄 수 있으며, 또 어떤 것을 추하다고 할수 있는가.

우리들 삶이란 것도 그렇다. 어떤 삶이 선한 삶이며, 어떤 삶의 행보가 진실된 삶이며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며, 또 어떤 삶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향하고 있는 것인가. 세상은 온통 의문부호 투성이다.

세상과 사랑과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부호를 잔뜩 안겨준 그녀를 만나러 가평꽃동네 노체리안드리자애병원 병실을 찾아가던 날, 슬픔처럼 겨울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나직히 흘러나온 말.

‘아, 겨울이야!’

우리가 그녀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리 알아두어야만 할 것들이 있다. 우리를 옥죄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와 비리, 그리고 제도화 되다시피하여 이제는 둔감해진 도덕불감증. 일련의 사회의 부정항의 모습, 그 구조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향기를 잃어갔고, 삶의 윤기를 잃어갔고, 눅눅하고 음습한 검은 입을 벌리고 있는 죽음과 대면하게 됐다.

양경희씨는 이제 서른 셋의 나이다. 그리 썩 아름다운 얼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아주기에 싫은 얼굴도 아니어서, 그저 우리의 주위에 있는 누이요, 친구요, 동생과 같은 모습이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요, 누구와 다를 바 없는 고운 마음을 가진 그녀가 살아온 삶은, 그러나 암울하기 이를 데 없는 편린들로 이루어진 것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요. 자기의 삶은 자기가 꾸려나가는 법, 가정환경이 아무리 좋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 삶의 불행을 키운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불행의 씨앗으로 잠재돼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 그 삶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 것은 저 자신이니까요. 그렇지만 단지 이 말만은 하고 싶네요. 불행은 불행을 불러오는 법, 세상의 여동생들과 또 그 여동생들, 그리고 이제 태어나려는 여동생들에게 제 삶을 보면서 저처럼 살지는 않기를, 삶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자존自尊의 마음이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를 말이죠.”그녀가 처음으로 가출한 것은 열한 살 때였다. 아버지의 바람기가 심해 부모 사이가 좋지 않았다. 급기야 부친은 어머니가 버젓이 있는데도 한 여자를 데리고 들어와 엄마라 부르기를 강요했다. 집이 싫어졌다. 게다가 어머니도 남편의 바람기를 견디지 못하고 따로 나와 살았다. 그녀는 무작정 집을 나왔다. 그리고 대전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서울역에서 잡혔어요. 당시엔 가출소녀들이 많았던 탓인지 수상쩍은 아이들은 경찰들이 잡아서 연고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연고자가 없으면 고아원에 넘기던 때였어요. 고모와 연락이 닿아서 큰오빠가 절 데리러 오더군요. 오빠는 엄마와 연락이 닿고 있었어요. 그래서 엄마가 사는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됐지요.”그러나 그것도 잠시, 열여섯 살에 그녀는 두 번째로 가출을 하게 됐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혼자 고생하는 모습을 보기도 싫었고, 가난하기 그지없는 집이 싫었다. 청소년기의 반항심리도 한 몫을 했다.“무얼 해도 먹고 살기야 못 하겠는가 싶어 그냥 집을 나왔어요. 친구들을 만났어요. 그 친구와 뜻을 같이해 술집으로 갔지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죠. 나이가 어리다고 받아주지 않더군요. 친구 세 명이서 무작정 돌아다녔어요. 돈 있으면 밥 먹고 없으면 굶고 잘 곳 없으면 역전에서 자고…… 열 여덟이 되니까 제법 처녀 모습을 갖췄다고 생각되는지 술집에서 받아주더군요. 다방에도 나가고…… 처음에는 열심히 노력하면 제법 돈을 만지겠구나 희망도 있었지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우리는 쓴 적이 없는데 자꾸 빚만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거예요.”그녀는 큰 빚을 지게 됐다. 유흥업소가 대부분 그렇듯이 그녀도 그곳의 구조적인 ‘덫’에 걸렸던 것이다. 돈을 쓰지 않아도 이 명목, 저 이유, 이런저런 빌미를 붙어가며 그들은 교묘하게 돈을 강탈해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몸도 마음도 병든 그녀들에게 큰 빚더미만 안겨다주고 있었다.“이렇게 살 수는 없다 싶더군요. 어리석게도 때늦은 후회였지요. 친구들과 탈출을 계획했어요. 인천 학익동에 있는 한 ‘티켓다방’에서였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도망을 치는데, 맙소사 바로 골목도 돌아서기 전에 ‘덩캄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막아서는 거예요. 알고보니 알고 지내던 언니라는 작자가 우리가 도주한다는 것을 알고 미리 귀띔을 해준 것이었어요. 발길질부터 나오더군요. 주먹으로 때리고, 각목으로 어깻죽지를 내리치고, 얼굴이며 복부며 가릴 것 없이 무차별 구타가 시작됐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맞아 본적이 없었지요. 주먹질…… 발길질…… 내려찍는 각목…… 혼미해지는 정신…… 결국은 혼절하고 말았어요. 너무 맞았던 탓이지요.”그녀는 결국 그 일로 인신매매범들에 의해 사창가로 팔려나가는 신세가 됐다. 그녀가 팔려간 곳은 속칭 ‘옐로우 하우스’였다. 팔려가기 전 그녀는 주인에게 빌었었다. 제발 집에 보내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러나 주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종국엔 차라리 다방이나 술집으로 보내달라고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주인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돈을 썼으니 값을 하라는 것이었다. 1주일간의 감금생활이 끝나고 그녀는 사창가로 팔려가는 신세가 됐다.“그 곳 생활, 정말 떠올리기도 끔찍합니다. 그건 생활이 아니었어요. 그저 몸뚱아리 밖에 없는 동물과 한가지예요. 아니, 차라리 동물이라면 낫지요. 저는 생각이라는 사치스런 것이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매일매일 수십 차례씩 벌어지는 그 짓으로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지요. 결국은 자포자기의 상태가 될 수밖에 없더군요.”옐로우 하우스에서 그녀는 1년간 있었다. 그녀는 자포자기의 상태였다. 옐로우 하우스에서 다시 그녀는 학익동 사창가로 팔려갔다. 그곳에서 또 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녀는 다시 정신을 추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살 수는 없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그녀는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그때 미장원에서 예전에 알던 친구를 만나게 됐다. 둘은 의기투합했다. 탈출 계획을 다시 세웠다. 지옥같은 그 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죽음이라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목욕탕을 가는 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그녀와 친구는 탈출을 시도했다. 잡히면 죽는다는 위기의식이 엄습해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금세라도 ‘어깨’들이 뒤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서울역에서 그녀는 대전행 기차를 탔다. 오빠가 살던 집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빠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가고 없었다. 다시 대전역으로 왔다. 어디로 갈 것인가. 망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사창가 포주는 그녀의 연고지인 대전에 이미 깡패들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그 곳에서 그녀는 다시 잡히는 신세가 됐다. 포주는 말썽많은 그녀를 더 이상 데리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몸 값으로 거금을 받고 흑산도에 팔아넘겼다.“흑산도는 우리같은 여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었어요. 그 곳은 섬이었기 때문이죠. 거기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어요. 한 번 발을 딛게 되면 죽기 전에는 나오지 못한다는 불문율 같은 것이 그 곳엔 있었으니까요. 세 번을 도망쳤는데 세 번 모두 잡혔어요. 배를 타야 뭍으로 나올 수 있는데 선장조차 포주들 편이었으니까요. 세 번째 잡혔을 때 절망은 극에 달했어요. 그래, 차라리 죽자, 그런 마음으로 바다에 투신을 했어요. 그런데 그곳 사람들 얼마나 수영을 잘합니까. 곧바로 구조되더군요.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할수 없는 곳이었지요.”그 곳 ‘장사’는 뱃사람을 보고 살아가는 패턴이었다. 오징어배, 꽁치배, 갈치배…… 이 배 저 배에 타고 있는 선원들을 대상으로 호객 행위를 하고 그들을 유혹해와서 돈을 우려내는 것이 그 곳 장사의 패턴이었다. 그러니까 하루에 배가 열 번 들어오면 열 번을 나가 ‘손님’을 유혹해와야 하는 것이었다. 손님을 모셔오는 실적이 저조하면 포주로부터 감금을 당하고 무차별 구타가 이어지곤 했다.“하룻밤에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면서 그짓을 해야 했지요. 심한 경우엔 하룻밤에 예닐곱 명까지 받아내야 했을 지경이었으니까요. 정신이고 육체고 성한 곳 없이 모두 망가졌지요.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제 손목을 보세요. 이게 다 그때 생긴 질긴 인생의 흔적이지요.”그녀의 손목에는 오른손 왼손 할것없이 수십 군데 난도질 당한 상흔이 남아 있다. 동맥을 끊고 죽으려고 스스로 자해한 것이었다. 칼을 그렇게 그어댔는데도 그녀는 지금껏 살아있다. 흉칙스러운 상흔은 그녀의 삶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 곳엔 보건소 정기검진도 없었다. 기껏 보건소가 하는 역할이라는 것이 임신한 거리의 여자들에게 낙태수술을 해주는 것이 전부였다는 게 그녀의 경험담이다.“성병性病이 걸렸는지 어떤지도 알지 못했어요. 그 곳에서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보건소에 두 번 찾아간 것은 생리가 없어서였죠. 두 번 모두 임신이더군요. 그럴 땐 또 어찌나 신속하게 낙태 수술을 해주던지……”죽기 전에는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흑산도로부터 뭍으로 나올 수 있는 행운이 그녀에게 찾아왔다. 알고 있는 소개소 사람이 아가씨 둘을 데려왔는데, 그녀들과 그녀는 맞교대 할 수 있게 됐다.뭍으로 나온 그녀는 광주로 갔다. 새로운 인생을 찾고 싶었다.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사회에는 없었다. 기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 학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자신의 몸뚱이로 살아가는 법 밖에는 없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그녀는 광주에서 술집에 나갔다. 주인은 마음이 좋은 편이었다. 그 곳에서 한 달을 일했다. 그러나 그 일은 그녀 스스로 찾아간 곳이었음에도 그녀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다시 이런 일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 곳을 나왔다. 전주로 갔다. 그러나 막막하기는 전주 또한 매한가지였다. 스스로 그만두겠다던 결심도 이내 허물어지고 그녀는 다시 매음굴賣淫堀로 들어갔다. 사창가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그녀 또한 그 일 외에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쏠쏠하게 들어오는 돈맛에 길들여진 가여운 여인들, 사창가의 여인들은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었다.“일하던 집에서 나왔어요. 돈도 조금 벌었죠. 그런데 갑자기 쓰러졌어요. 검진 결과 자궁에 혹이 생겼기 때문이라더군요. 수술을 하고 자궁을 들어냈어요. 그때까지 조금 모아두었던 돈이 모조리 병원비로 나가게 되더군요. 그 집에서 6년간 일했는데, 고운 정 미운 정이 들었던가 봅디다. 그 집 포주인 언니가 나를 참 잘 대해줬어요. 병원비가 모자랄 때 언니가 돈을 털어 보태 주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동생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는 언니에게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이라는 것을 느끼게 됐지요. 다시 들어와 손님은 받지 말고 요양이나 하라고 언니가 말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요.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고, 적어도 처음으로 제게 정을 주었던 언니인데, 걸림돌로 남고 싶지는 않다고 스스로 오기를 부렸죠.”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 일곱이었다. 평택으로 갔다. 여름엔 다방엘 나가고 겨울엔 술집을 전전했다. 몸이 점점 안 좋아졌다.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1997년부터 그 증세가 시작되고 있었다. 항문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병원에서는 치질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치질약을 먹었는데도 전혀 호전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통제를 맞아야 겨우 버틸 수 있었다.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갑자기 쓰러졌다. 의식까지 잃었다. 119구급차에 실려 그녀는 병원으로 후송됐다. 그 병원에선 그녀에게 항문암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아주대병원으로 갔다. 그녀에겐 돈이 없었다. 시청 공무원에게 부탁했다.“전 돈이 없어요. 극빈자 처리로 수술을 받게 해 주세요.”그 공무원은 그녀를 극빈자로 처리해 주었다. 그러나 수술 불가 판정이 났다. 이미 다른 곳으로 암이 전이轉移됐기 때문이었다. 방사선 치료와 약물치료가 전부였다. 구토하기 일쑤였고, 늘 현기증에 시달려야 했다. 8개월간 아주대병원에서 입원했던 그녀는 다시 수원의료원으로 옮겼다. 그 곳에서 다시 4개월간 입원했다. 그녀를 살갑게 대해주던 시청공무원이 그녀에게 전화했다.“갈 데도 없고 몸이 그러니 꽃동네 한 번 찾아가 보는 게 어떻겠어요?”“꽃동네요? 꽃이 많은 동네인가보죠?”친절한 공무원의 주선으로 그녀는 꽃동네에 들어왔다. 그러나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하여 그녀는 참지 못하고 꽃동네에서 퇴소했다. 그녀가 다시 꽃동네에 들어온 것은 1998년 11월 5일. 가평꽃동네 노체리안드리자애병원에서 그녀는 잊지 못할 한 사람과 만나게 됐다.

변순덕 씨.

쉰줄을 넘어선 변씨 또한 그녀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사회 경험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변씨 또한 자궁암으로 투병 중이었다.

“제가 늘 엄마라고 불렀어요. 그분도 자궁암으로 퍽 고생하셨는데, 저보다도 더 중증이었죠. 저보다는 늦게 노체병원에 들어왔으니까 제가 고참인 셈이죠?”

변씨는 자궁암으로 늘 몸이 지저분해져 있었다. 자궁에서 흘러나오는 분비물은 그 악취가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변씨를 친어머니 모시듯 정성으로 돌봤다. 똥 오줌 치우고, 기저귀를 갈고, 얼굴을 닦고, 목욕을 시키고, 화장실 모시고 가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고, 식사 때면 늘 숟가락에 죽을 떠 넣어주곤 했었다. 처음엔 휠체어를 타고 다녔는데 병세가 점차 악화돼 거동도 못하게 됐다. 그만큼 그녀의 일은 늘어났다.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주위사람들로부터 경원의 대상이었던 변씨도 그런 지극 정성인 그녀에게만은 늘 미안한 마음으로 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부터 변씨의 병간호를 자신의 몫으로 여겼다. 어쩌면 그 일은 주님께서 주신 일일지도 모른다는 느낌마저 갖게 됐다.

“엄마, 내가 다 해줄테니까 편하게 생각해. 나 엄마 딸이잖아. 너무 미안해 하지 말고.”

시간이 흘러갔다. 흘러가는 시간의 깊이만큼 변씨의 병세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그리고 2000년 7월 14일, 변씨는 그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임종했다.

“제 옆에서 돌아가셨어요.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무언가 유언을 남기시려는 것 같았는데 입도 떼지 못하고 가셨지요. 눈도 못 감고 말이죠. 엄마의 딸이 있었나 봐요. 딸 사진을 손에 꼬옥 쥐어주고 눈을 쓸어내리니까 그제서야 눈을 감으시더군요.”

노체병원 복도에는 아직도 변씨와 그녀가 엄마와 딸처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붙어있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진을 한번씩 어루만진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란다.

“덤덤하더군요. 이젠 눈물샘조차 말라서 나올 눈물도 없어요. 살아오면서 너무 많이 울어서, 울다 울다 너무 지쳐서, 너무도 힘든 투병생활로 울 힘도 없어서 울 수가 없어요.”

그녀도 처음 노체병원에 왔을 땐 대면하기 힘든 부류의 환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생활도 밑바닥이었고 죽을 병까지 걸려 눈에 보이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간호사 언니들하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죠. 욕도 해가면서 말이죠. 죽을 고통 때문에 그땐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그 정도로 고통이 심했어요. 이제는 제 숙명이려니 하면서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답니다.”

그녀에게도 사랑이 있었다. 그녀가 평택에 있을 때 ‘손님’으로 만난 남자였다. 그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녀에게 그가 전화를 했다. 한 번 만나자는 것이었다. 만나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다른 사람과 달리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말 한 마디 더 해주는 그가 믿음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사랑의 깊이가 깊어 갈수록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됐다. 그에게 부담을 주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열 여덟 꽃다운 나이에 처녀성處女性을 잃고 삶의 가장 음습한 하층부에서 살아온 자신을 돌이킬 때 그는 자신에게 너무도 과분한 사람이라는 자괴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것을 포기했다.

“저도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의식이 가물가물해질 때가 있지만,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죽기 전까지 할머니들을 보살피고 싶어요. 그러면서 편안하게 죽고 싶어요. 죄 많은 인생, 좋은 일도 조금 하다 가야 되지 않겠어요? 할머니들은 저보다 더 힘들잖아요. 나이도 드셨으니 외로움도 더 타시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마치고 싶습니다.”


그녀의 기도는 애절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과거, 자신의 삶을 잊게 해달라는 것이다. 하여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불행한 삶, 바람기 많았던 아버지, 어머니를 버렸던 아버지의 죄업까지 용서하기로 했다. 이미 오래 전에 작고하신 아버지를 탓해 무엇하겠느냐는 생각도 있지만, 이제 그녀 스스로도 아버지가 있는 그 쪽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용서를 빌고 싶은 이도 있다.
처음으로 정을 알게 해 주었던 포주 언니. 그 언니에게서 500만 원을 가져다 썼는데 그녀는 그 빚을 아직도 갚지 못하고 있다. 저 쪽 세상에 가서라도 그녀는 언니에게 참 용서를 빌고 행복을 기원하고 싶다고 한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고 싶어요. 가족끼리 오순도순 행복한, 그저 남들 사는대로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라다가 평범하게 결혼하고 평범하게 아들 딸 낳고 평범하게 늙다가 평범하게 죽고 싶어요. 저에겐 그런 평범함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특별함이기 때문이죠.”

그녀는 장기기증을 약속했다. 몸 아프지 않은 곳이 있다면, 몸 가운데 효용이 닿는 것이 있다면 온 몸을 남에게 주고 싶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의 항문은 자꾸 졸아들고 있다. 때문에 배가 자꾸만 불러온다. 처음 보는 이는 그녀를 두고 혹 임산부가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배변을 하면 항문과 질 두군데로 나온다. 그 때문에 너무 아프다. 전에 수술할 때 독한 약을 쓴 탓일 것이라고 그녀는 막연히 추측하고 있다.

그녀는 삶 자체가 지옥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저쪽 세상으로 가는 게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그녀는 말한다. 삶 자체가 행복이라고. 죄만 짓고 산 인생, 지금 조금씩 조금씩 할머니들의 병수발을 들면서 봉사의 삶을 사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러니 그녀에게는 삶도 행복이요, 죽음도 행복이다.
남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듯 큰 행복으로 다가오는 것인 줄 그녀는 알지 못했었노라 고백한다. 덧붙여 그녀는 말한다.

“이 세상에 저같은 여자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자들이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약한 여자, 그 여자들의 행복을 무참하게 짓밟는 사회의 구조가 여자들을 먼저 생각해주는 그런 사회로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거리의 여자들도 동물이 아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당신들처럼 울음이 있고 웃음이 있고 기쁨이 있고 고통이 있고 절망과 환희를 모두 느낄 줄 아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녀는 떠났다.
슬픔처럼 겨울비가 내리던 날 처음 만난 그녀는 그리 슬퍼보이지는 않았었다. 자신의 죽음을 이미 인정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 겨울비를 맞으며 한숨처럼 ‘아, 겨울이야!’ 나직히 되뇌었던 기억을 저편으로 이제는 묻어야 한다. 그녀는 이미 그때 항문암 말기였다. 그녀의 간호를 맡았던 수녀님이 말했었다.

“본인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리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또 그렇게 한 사람을 떠나보냈다. 그녀가 떠난 것은 필자가 그녀를 알게 된 지 반 년 정도 지난 뒤였다. 죽음이 임박해 왔을때 그녀는 몹시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었다고 한다. 술도 자주 마셨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만큼 몸 속까지 저며오는 육체적 고통 또한 컸었다고 한다. 온 몸으로 전이된 암세포와 싸우며, 고통스러워하고, 절망하고, 고뇌하다 그녀는 떠났다.

극적 종결이라면 그녀가 자신의 죽음에 끝까지 초연했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서, 자신의 죽음에 끝까지 초연할수 있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어찌보면 그녀는 가장 인간답게 살았고 인간답게 저 편으로 갔다. 그 인간다움의 불완전성을 뒤로하고 우리는 기도한다.

“이제는 저 편 세상에서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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