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출신 문인 무소유 자유인으로 산 '한국의 디오게네스'

소식의 '적벽부' 끝에 고 민병산 선생의 낙관과 이름이 선명하게 눈에 띈다.

'거리의 철학자' '한국의 디오게네스'로 불렸는 청주 출신 고 민병산 선생(1928∼1988, 본명 민병익)의 본격 서예 작품이 경매를 통해 공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작품은 고인이 1984년 쓴 소식의 '적벽부'로  가로 138m + 세로 24cm의 족자로 특유의 흘림체(가칭 호롱불체)로 완성했다. 그동안 유품으로 나온 고인의 서예 작품 가운데 대작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번 작품은 지난 22일 서울 경운동 수운회관에서 열린 '코베이' 22회 현장 경매를 통해 출품됐다. 이날 우연히 경매장에 들린 김호일 전 청주문화산업진흥재단 사무총장의 눈에 들어 낙찰받았고 자신의 SNS를 통해 공개한 것. 올해는 고인의 작고 30주년으로 청주 문화예술계와 인연을 맺은 김 전 총장을 통해 운명적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셈이다.

'코베이'측은 예정가 10만원으로 작품을 내놓았으나 김 전 총장 이외에 3명이 경쟁을 벌여 최종적으로 40만원대에 낙찰됐다. 

경매 물품 안내자료에 소개된 고 민병산 선생의 서예 작품

낙찰자가 된 김 전 총장은 "청주에서 고인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날 경매장에서는 까맣게 잊은채 글씨 자체가 마음에 들어 사고 싶었다. 경쟁자가 있었지만 꼭 갖고 싶어서 낙찰을 받게 됐다. 집에 돌아와 검색해보니 청주의 문인이자 철학자인 고 민병산 선생이란 사실을 알고 '아차, 그 분이었구나'라고 무릎을 쳤다"라고 말했다.

이어  "족자 주변에 2cm 가량의 비단 배첩이 붙은 걸로 봐서는 액자에 넣어 감상했던 작품으로 보인다. 나와 인연을 맺게 된 게 신기해 지인인 코미디언 전유성씨에게 얘길했더니 '나도 인사동의 인물이셨던 민 선생님을 잘알고 있다. 글씨도 한 점갖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건네주겠다"고 하더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청주시가 공익목적으로 필요하다면 언제든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고 민병산 선생의 삶과 인생은 드라마틱했다.  고인의 큰 할아버지는 구한말 괴산군수와 청주군수를 지낸 민영은(閔泳殷)이었고, 아버지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나온 엘리트였다. 청주에서 대부호로 꼽히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재산을 포기하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11살 때 서울로 이사해 살다가 동국대를 졸업하고 27살에 청주에 내려와 충북신보(현 충청일보) 기자와 청주상고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이때 '민구관집'으로 불렸던 고인의 문화동 자택은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 됐었다.

생전의 고 민병산 선생과 청주 가경동 발산공원에 세운 고인의 문학비<이은봉씨의 다음 카페 '돌과 바람의 시'에서 펌>

30살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 관철동과 인사동 일대에서 무소유 자유인으로 삶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얻은 별명이 ‘인사동 3전설’로 ‘귀천’의 시인 천상병, 극작가 겸 문필가 박이엽과 함께 인사동의 터줏대감으로 불렸다. 고인은 철학 문학 역사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동서고금의 서적을 독파, 해박한 지식으로 번역서와 수필 등을 남겼고 서예에도 능했다. 1960년 <새벽>지에 ‘사일의 철학적 단편’, ‘사천세의 은자’를 발표해 이름을 알렸다. 이후 <사상계> <세대> <창작과비평> 등에 여러 편의 철학 에세이와 전기를 발표했다. 사후인 1990년 지인들이 유고집 ‘철학의 즐거움’을 펴냈다.

88년 9월 환갑을 맞아 지인들이 조촐한 자리를 준비했지만 아쉽게도 하루전날 지병인 천식으로 운명했다. 생전의 절친인 신경림 시인은 ‘세월청송로(歲月靑松老)’란 시에서 ‘민병산 선생은 회갑 바로 전날 세상을 떴으니/ 세상에 만 예순해를 머문 셈이다/ 가족이 없는 그를 위해 친구와 후배들이/ 잔치를 열어준다는 걸 극구 마다했을 때/ 그의 뜻대로 했더라면 그는/ 그렇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준비했던 잔치 음식은 장례 음식이 되고/ 회갑 옷은 그대로 수의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올해 작고 30주년을 맞아 조카 민영기씨가 유고집을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청주시 문인협회는 지난 2000년 흥덕구 가경동 발산공원에 민병산문학비를 건립했다. 생전의 지인이었던 임찬순 소설가는 비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민족이 고통받던 식민의 시대, 우리고장에서 태어난 민병산은 파란 많은 세월을 몸 전체로 부딪히면서 일신의 화려한 영달과 안락을 뿌리치고 완전하고 철저한 무소유와 독신의 삶을 선택하여 뛰어난 작가로서, 철학자로서의 일생을 가장 비범하게 살았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