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온달 장군의 전사지로 알려진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사적 264호 '단양 온달산성(丹陽 溫達山城)'은 신라가 축성했다는 주장이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31일 단양군에 따르면 2002년부터 2016년까지 다섯 차례의 시·발굴조사에서는 수혈주거지와 집수시설, 토기편 등 출토된 유구와 유물 연대가 통일신라에서 고려 초기에 걸쳐 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에서 온달 장군과 관련한 고구려 시대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앞으로 발굴조사를 통한 고구려 유물 출토가 과제다.

 (재)충북도문화재연구원 양병모 연구원은 최근 자신의 충북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삼국시대 단양 온달산성의 축조와 운영'을 통해 온달산성과 남한강 상류지역 성곽·고분유적 등을 비교 검토했다.

양 연구원은 논문에서 "온달산성의 성벽과 보축성벽, 치성, 문지, 배수시설, 집수시설 등은 신라 성곽의 특징을 보인다"며 "남한 내 고구려 성곽과 비교하면 온달산성을 고구려가 축성했을 근거는 현재까지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신라가 5세기 후반 동해안로와 죽령로를 통해 남한강 상류지역에 진출한 이후 6세기 중반 온달산성을 축조했고, 이후 신라가 계속 운영한 전형적인 신라 석축성곽으로 파악했다.

양 연구원은 온달 장군의 전사지로 알려진 아단성(阿旦城) 역시 온달산성과는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기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아단성과 서울 아차산성(峨嵯山城·사적 234호)과 아단성, 아차성(阿且城), 북한산성(北漢山城)을 동일하게 봤다.

온달산성은 온달설화가 조선후기에 창작돼 다양하게 전승됐고, 고구려 또는 온달이 축성했을 가능성과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판단했다.

산성 전문가들도 온달산성이 신라의 축성 방식을 따랐고, 신라의 유물과 문화층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6세기 중후반 고구려가 한강 이북지역을 일시적으로 재탈환했고, 지금까지 온달산성 발굴조사 면적이 전체 구간의 10%에 불과한 만큼 고구려 유물이 나올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 없다는 학계의 견해도 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2014년 충북향토문화 26집에 실은 논문 '고구려 성으로서의 온달성에 대한 논의'에서 "551년 신라가 백제와 동맹해 남한강 상류지역을 점령한 후 통일신라까지 400년 가까이 신라인이 소유하면서 온달성은 신라인이 부단히 관리·보축해 신라 양식의 축성 기법이  최종적으로 남겨졌다"며 온달산성을 처음 축조하거나 이를 이용한 국가로 고구려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았다.

이어 북문 폐쇄 사실과 관련해서는 "고구려의 남진 공세에 북쪽을 방어할 일이 절박한 신라의 입장이 포착된다"며 "북문이 달린 온달성을 축조한 세력으로 고구려의 가능성이 한층 커진다"고 강조했다.

아단성, 아차성에 관해서도 김현길 전 충주대 교수는 역시 같은 논문집에 실은 '아차성과 아단성고(考)'란 논문에서 "아단성과 아차성은 서로 다른 지명"이라며 "아차성의 위치는 서울 아차산이고,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은 단양 영춘"이라고 밝혔다.

 '삼국사기' 열전에 온달은 '계립령·죽령 서쪽지역을 되찾아오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 드디어 가서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웠는데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영락 6년(396)에 광개토왕이 정벌한 백제 58성(城) 중에 아단성이 나온다. 단양군 관계자는 "온달산성은 극히 일부 구간에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며 "앞으로 추가 발굴조사를 통해 고구려 유물 출토와 산성의 성격을 더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단양군은 온달관광지와 단양읍 일대에서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고구려 문화 축제인 단양온달문화축제를 해마다 가을에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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