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권 「그 저녁에 대하여」 전문

뭐라 말해야 하나
그 저녁에 대하여
그 저녁의 우리 마당에 그득히 마실 오던 별과 달에 대하여
포실하니 분이 나던 감자 양푼을
달무리처럼 둘러앉은 일가들이며
일가들을 따라온 놓아먹이는 개들과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들에 대하여
김치 얹어 감자를 먹으며
앞섶을 열어 젖을 물리던
목소리 우렁우렁하던 수양고모에 대하여
그 고모를 따라온 꼬리 끝에 흰 점이 배긴 개에 대하여
그걸 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겨운 졸음 속으로 지그시 눈을 감은 소와
구유 속이며 쇠지랑물 속까지 파고들던 별과 달
슬레이트 지붕 너머
묵은 가죽나무가 흩뿌리던 그 저녁빛의
그윽함에 대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저녁의
퍼붓는 졸음 속으로 내리던
감자분 같은 보얀 달빛에 대하여

─ 송진권 「그 저녁에 대하여」 전문(시집 『자라는 돌』에서)

그림=박경수

 

뭐라 말해야 하나, 밀물처럼 샘솟는 저 많은 것들에 대하여,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 같은 살가운 가난에 대하여, 김치를 얹어 찐 감자를 한입 가득 베어 물던 웅숭깊은 삶의 물결에 대하여, 앞섶을 열어 젖을 물리던 남정네처럼 걸걸하던 수양고모의 고단함 삶 속에 깃든 유쾌함에 대하여, 일가를 따라온 놓아 먹이는 개들과 졸음에 겨워 지그시 눈을 감는 늙은 소의 더없는 평화로움에 대하여, 쇠지랑물 속까지 파고들던 가죽나무 가지에 흩뿌리던 저녁놀의 그윽한 느슨함에 대하여, 감자분 같은 달빛 속으로 생이 마냥 즐겁게 흐르던 시절의 진득한 유대감에 대하여, 속절없이 퍼붓는 졸음 같이 온몸으로 파고들던 먹먹한 사랑에 대하여, 그걸 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다시는 가 닿을 수 없어 더욱 사무친 이 하염없음에 대하여, 정말, 뭐라 말해야 하나.

이 시인의 귀중한 기억의 언어는 다름 아닌 우리 고유의 정체성의 서술이지요. 잊혀져가는 혈연공동체의 소중한 정서를 바탕으로 한 은총 같은 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단지 잊혀진 기억들을 떠올려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자기 자신’, ‘잃어버린 삶의 가치’를 되찾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를 가리켜 ‘순수의 지속’, ‘시간마저도 유예시키는 영원성의 번역’이라 명명해도 무방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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