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파도가 이글거리는 해안의 절벽 위에서 햄릿은 가슴에 단검을 댄 채 허공을 향해 비탄에 젖어 신음하듯 내 뱉습니다. “살아야 할 것인가, 죽어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덴마크 왕자인 햄릿은 부왕의 갑작스런 죽음이 숙부 클로디어스 의 독살 때문이라는 사실을 망령으로 나타난 부왕(父王)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숙부가 지금은 부왕대신 왕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데 뻔뻔하게도 어머니가 숙부의 비(妃)가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견딜 수 없는 절망감에 빠지게 합니다. 햄릿은 어머니에게 환멸을 느끼면서 살아 있는 것이 차라리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이 고통을 없앨 수는 없을까.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죽음은 햄릿에게 있어서 원하고 원하는 바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보장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아니, 죽음이란 황천길을 떠났던 길손들이 하나같이 되돌아 온 일없는, 조그마치도 헤아려 볼 수 없는 절대 불가지(不可知)의 세계 인 것입니다. 그래서 햄릿은 죽음을 외치지만 막상 자살을 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은 그렇게 나약한 인간의 심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기살인’에 대하여는 자고로 두 가지의 의견이 맞서 왔습니다. 하나는 자살은 ‘개인의 고유한 권리’라는 것이고 하나는 ‘자살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이든 현실세계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생을 마감합니다.
얼마 전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00년 한해 우리나라의 자살자는 6460명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루 평균 18명이 목숨을 끊은 꼴이니 그 숫자가 엄청난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숫자는 12년 전 인 1988년의 7735명보다는 줄어든 것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작은 나라에서 하루 20명 가까운 사람들이 제 손으로 목숨을 끊는다는 사실은 OECD국가 중 자살율 최고라는 불명예와 함께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정신의학자인 칼 메닝거 에 의하면 자살은 일년 중 봄철에 가장 많으며, 여자보다는 남자가, 기혼자보다는 독신이, 시골보다는 도시가, 전쟁 때보다는 평화시에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구의 자살자들이 삶에 회의를 느낀 염세주의자들인데 비해 우리사회는 입시에 억눌려서, 집단 따돌림 때문에, 사업에 실패해서, 취업을 못해서, 빚을 져서, 장가를 못 가서와 같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자유당치하 이 던 1950년대 서울 한강인도교 초입에는 ‘잠깐, 5분만 참으시오!’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이루지 못 하는 사랑 때문에 비관하는 이 들이 많았기에 다리에서 강물로 투신하는 젊은이들에게 마음을 돌리라는 충고였던 것입니다. 참으라고 해서 죽음을 작심한 이들이 얼마나 발길을 돌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시대다운 ‘낭만적 풍경’이었다고 할 수 있음 직합니다.
지금 우리사회 자살의 특징은 인터넷을 통한 청소년들의 증가추세라는 점입니다. 한창 피어 나야할 꽃 같은 나이에 삶을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어떤 이유를 댄다해도 그 사회가 좋은 사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황폐해 질대로 황폐해진 우리사회의 반 교육적 환경이 청소년들을 자살이라는 마지막 길로 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성해 봐야 하겠습니다.
5월은 청소년의 달,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이 모두 이 5월에 있습니다. 신록 무르익는 계절의 여왕 5월이 우울한 달이 돼서는 안되겠습니다. 건강한 사회에 건강한 가정이 있고 건강한 가정에 건강한 청소년이 있습니다. 햄릿의 절규는 연극으로서 족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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