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탁번 「그렇지, 뭐」 전문

‘어떻게 지내니?’ 물으면 ‘그렇지, 뭐’할 뿐 더 이상 말이 없다 이 말만 듣고는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없다 허나 우리 동네에서는 이 말만 듣고도 엊저녁 밤농사가 신통했는지 안 했는지 고추농사 재미 봤는지 비료 값 농약 값 빼고 나면 말짱 헛농사 지었는지 훤하게 안다

눈빛과 말품을 보고 안다 진짜 뜻은 애당초 말이나 글로는 다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장에 가서 농산물 팔고 오는 이에게 오늘 어땠느냐고 물어도 ‘그렇지, 뭐’ 이 한 마디 뿐 더 이상 대꾸가 없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서는 다 안다 헐값에 팔았는지 유기농이라고 허풍 떨어서 바가지 씌웠는지 갈쌍갈쌍한 눈빛을 보면 다 안다

몇 년 전 외아들이 선산까지 다 팔아먹고 도망간 정미소집 늙은 홀아비는 동네 사람들이 위로하면 기러기 날아가는 하늘 한번 쳐다보며 ‘그렇지, 뭐’ 늘 이 한 마디뿐이다 옥양목 두루마기의 헐렁하게도 서늘한 소매처럼! 빨랫줄에 앉았던 잠자리가 쇠파리 잡으러 날아올랐다가 이내 고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 오탁번 「그렇지, 뭐」 전문(시집 『우리 동네』에서)

(그림=박경수)

 

여기서 ‘우리 동네’는 어디일까요? 아직도 훈훈한 촌락 공동체적 삶의 유대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을. 고려대학에서 정년퇴임한 후, 고향인 제천 백운으로 낙향한 시인은 그곳에 ‘원서문학관’을 차리고 후진 양성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 고장 사람들은 무표정하고 심드렁하니 굼떠서, 선 굵은 단호함도 재기 번뜩이는 센스도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품성은 웅숭깊고 따뜻한 데다, 매사 가볍게 동하는 법 없이 언행이진중합니다. 점잖은 속내는 잡스럽지 않고, 행동거지가 진득하니 안존하지요. 기쁨이나 슬픔을 과장하지 않으며 남에게 의중을 쉽게 내비치는 일도 없습니다. 말을 삼가고 풍습은 너그러우며 이웃에 대한 헤아림 또한 깊고 따스합니다. ‘잘 지내시쥬?’, ‘뭘유.’ 어떤 미물과도 통용되는 이 살가운 충청도 토박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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