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돈 「아버지의 돋보기」 전문

진갈색의 굵은 뿔테를 두른 두터운 유리알
유행에 뒤떨어진 아버지의 돋보기
입김으로 남루를 지우고 조심스레 걸쳐본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눈가의 안개 걷히고
영리한 활자처럼 추억이 살아 움직인다
한지 같은 흰옷 정갈히 입고 얌전히 앉으시어
몸을 느릿느릿 흔들며 한적을 읽으시는 아버지
가끔 꿈속에 근심스런 얼굴로 찾아오셔서
아주 먼 곳에 계신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글소리 듬뿍 배인 돋보기를 걸치면
싸리나무 회초리가 무서운 서당 아이
꿈결인 듯 물결인 듯 호밀밭을 내닫는다
노고지리 한 마리 파르르 하늘로 치솟는다

아, 빈 하늘 안쪽의 견고한 중심이여

─ 권희돈 「아버지의 돋보기」 전문(시집 『하늘 눈썹』에서)

 

(그림=박경수)

선친의 유품인 굵은 뿔테를 두른 낡은 돋보기는 육친을 향한 간절한 동경의 등가물이지요. 살아계실 때 아버지의 모습은 그 자체가 바로 자식의 인생에 이정표가 되기도 합니다. 눈이 부신 한지 같은 흰옷 정갈히 받쳐 입고, 느릿느릿 한적을 읽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 근엄하고 존엄한 나머지 아직도 내 마음에 생생하게 살아 있지요. 가끔 꿈속에 근심스러운 얼굴로 찾아오시는 아버지의 존영은, 거친 인생 속에서 그야말로 정신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이며 올곧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입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작은 우주이지요. 아버지가 살아가신 인생에 따라 나의 세계관은 지배 받을 수밖에 없고, 아버지의 삶에 따라 내 인생의 궤도도 크게 영향을 받게 마련이지요. 그리하여 때로는 끝없는 광야를 달리기도 하고, 험준한 산맥을 오르기도 하며, 또는 깊은 강물을 자맥질하기도 하지요. 더욱이 아버지의 음성적 특징이 내 말소리에 묻어나고, 아버지의 자태가 내 몸태에 배어나는 그 경이로움이 다시 내 자식의 몸놀림이나 음색에 또다시 묻어나는, 이 우주적 신비야말로 ‘빈 하늘 안쪽의 견고한 중심’이 주는 신성한 힘입니다. 다산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선친에게 직접 한학을 공부하신 시인이라 이렇게 좋은 아버지 시를 쓸 수 있었던 거지요.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