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아버지의 꽃밭」 전문

소질 없는 돈벌이를 피해 일찌감치 아랫목 동굴 속으로 들어간 아버지가
눈발 치는 겨울이면 어둠보다 먼저 일어나 길을 쓸었다
아버지의 겨울은 멀리 빙원을 가로질러 타박타박 오고 있는누군가를 기다리는 초조함 같았다

매화바람이 당도해야 굴 밖으로 나온 아버지바람같이 몇 차례 꽃시장을 다녀오고
담 밑의 흙을 깨워 오랜 기다림의 살점을 옮겨 심었다그 의식은 다정하고 조심스러웠다

겨우내 앙상지던 사내가 꽃밭에서 일어나
연둣빛 허리를 펴고 비로소 하늘과 눈을 맞추는 것을 보며우리 가족은 먼발치서 봄을 살았다

꽃밭은 처녀같이 자랐다
꽃잎의 문이 열리고 색색의 향내들이 쏟아져 나와여름 내내 긴 머리채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낮밤 없는 그들만의 성채에서 아버지는 한 해를 다했다

동굴이 사라진 그해에도 눈은 푹푹 내렸으나우리는 아무도 길을 쓸지 않았다
꽃밭은 곧 아버지를 따라갔다
아버지는 꽃밭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 김혜경 「아버지의 꽃밭」 전문[<충북작가> 31호(2011년)에서]

그림=박경수

 

눈이 푹푹 내리고, 아무도 쓸지 않은 길을 따라 아버지의 봄은 다시 오지 않았어요. 꽃밭의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의 회색 실루엣만 폐원의 추억 위에 쓸쓸하게 걸어둔 채. 생명의 유한성에 좌초되어 난파한 아버지의 꽃밭은 삶의 소멸을 넘어 유일한 생의 위안이었지요. 아버지의 생존력은 퇴화하고 피안은 점점 멀어질 때, 그래도 숨결이 이어지는동안에는 이 근면한 꽃밭 가꾸기는 눈물겹도록 유지되었어요.

왜, 아버지는 이토록 꽃밭에 몰두했을까요. 너무나 권위적이셨던 당신이 홀로 삭이던 가족을 향한 사랑의 열정은 아니었을까요. 어긋나 맞지않는 세상의 길 위에 수레를 몰아야 하는 곤고함 속에서 오직 꽃밭만이 당신의 구원을 향한 영혼의 탐닉은 아니었을까요. 오랫동안 자존과 위엄을 괴롭힌 불행과 회의, 자식에게 걸었던 빛나는 희망들, 이 불가사의한 삶의 피륙 속에 감추어진 당신의 속내는 아니었을까요.

모든 고통이 정화되는 그 자리가 분명 아버지의 꽃밭이었기를 빌어봅니다. 햇살과 진흙 냄새가 묻어나는 울안에 꽃밭을 들이고 초롱으로 물을 주시는 아버지의 파자마 입은 모습이 몹시 그리워집니다. 지금은 사라진골목 안 풍경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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