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산문 깊이 읽기 … 박희병의 <연암을 읽는다>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지음 돌베개 펴냄

꼭 20년 전인 1997년에 연암 박지원의 산문집을 구해 읽은 적이 있다. 당시 영남대학교 한문학과 김혈조 교수가 번역한 것을 학고재에서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란 제목으로 펴낸 책이다. 박지원 하면 《열하일기》를 얼른 떠올릴 줄은 알아도 옛날 교과서에서 봤던 <일야구도하기>나 <호질>, <허생전> 같은 소설이 거기에 들어있는 글인 줄은 몰랐던 때.

책을 찾아 면지(面紙) 앞장을 보니 비 오는 저녁 ‘좋은생각’으로 가는 길에 창신문고에서 샀다는 자필 메모가 선명하다. 서른세 살 무렵, 철부지로 가정을 꾸리고도 앞길을 가지런히 못 하고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제호로 쓰인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란 글에 유독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20년 동안 장님으로 살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는 갈 곳을 몰라 우는 사람에게 “도로 눈을 감아라!”라고 일러주었다는 이야기. 본분으로 돌아가라는 그 역설은 내게 어떤 심상(心象)이 되어 길을 잃을 때마다 나침반이 되어 주곤 했다. 연암의 산문조차 막연한 이미지로 간직한 것인데, 아마 나의 독서가 대체로 그러했을 터이다.

박희병의 저서 《연암을 읽는다》는 그런 수박 겉핥기와 전혀 다른 독서를 보여준다. 연암의 수많은 산문 중에서 스무 편을 골라 다루는데, 글마다 세세히 분석하고 종합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것은 단순한 독서라기보다 학문 수준의 연구라고 해야 마땅할 듯하다. 글이 쓰인 시점의 개인적·정치적 배경을 확인하고, 등장하는 인물과 지명, 인용구의 출전과 의미를 일일이 설명하고 글 속에 담긴 필자의 심리까지 상정(想定)해 본다. 문장을 이루는 자구(字句)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이니 ‘연암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라는 저자의 말이 과언이 아니다.

그 지난한 작업은 연암의 치밀함과 깊은 사유의 실체에 근접해 보려는 노력일 터이다. 일찍이 《나의 아버지 박지원》(원제 ‘과정록’) 서문에서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독일에 괴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고 호언했거니와 연암의 글을 대하는 저자의 마음은 경건함으로 가득하다. 일단 연암 속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자신의 주해(註解)와 평설(評說)을 모두 잊어달라고 주문할 만큼 절대적이다. 저자에게 연암을 읽는다는 것은, 연암이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에 분노했는지 연암이 되어 느껴보는 일이다.

대중들에게 친절한 연암 안내서

“강가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득 강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는 날 쪽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당시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박지원 <큰누님 박씨 묘지명> 부분)― 이 문장에는 떠나가는 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서 있는 연암의 시선이 내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 ‘펄럭이고’와 ‘아득히’와 같은 단에서 확인되듯 배의 움직임에 따른 연암의 심리적 추이가 잘 표현되어 있다. (중략) 배의 움직임에 따른 작자의 감정적 파문은 이 문장의 마지막 구절인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라는 말에서 최고도로 증폭되고 고조된다.

(중략) 그리하여 현재의 풍경과 옛 에피소드 속의 누이가 일체가 되고, 부재와 현존, 현실과 기억이 뒤범벅이 되어 버린다.(<큰누님 박씨 묘지명> 평설 부분) “지금 석치는 진짜 죽었구나!”라는 구절에서 ‘지금(원문 今)’이라는 말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긴 가정문과 그에 이어지는 단정문의 경계 부분에 서 있다. 그리하여 이 단어는 현실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부터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마음에 이르기까지의, 한편으로는 퍽 당혹스럽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슬픈 연암의 심리적 추이를 응축해 내고 있다.(<정석치 제문> 평설 부분)

《연암을 읽는다》는 두말할 나위 없는 역작으로서 ‘깊이 읽기’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저자는 서문에서 ‘연암 되기’ 경험을 ‘실로 경이로운 일’이라고 고백했지만 나는 오히려 저자의 명석함과 근기가 실로 경이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람강기(博覽强記, 이런저런 책을 많이 보고 기억을 잘하는 것)를 경계하고 심원하고 정밀한 학문 태도를 귀하게 여긴(<홍덕보 묘지명>) 연암의 말을 신실하게 따르고 실천한 셈이다. 일반 대중이 연암의 글을 읽는 데 이만한 안내서가 또 있을까 싶다.

사족이 되겠지만, 독자의 처지에서 볼 때 지나치게 친절한 게 흠이라면 흠이란 말을 덧붙이고 싶다. 잘 구워진 생선은 그 자체로 눈에 들어와 입맛은 물론 온몸의 감각을 깨운다. 꼭 뜯어 바르고 먹어봐야 맛을 느끼는 건 아니잖은가. 글을 음미하는 일도 그런 면이 있어서, 나는 좋은 글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을 전해준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연암을 읽는다》는 생선을 발라서 밥숟갈에 얹어 먹여주는 모양이어서 맛있게 먹으면서도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고 싶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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