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아우내를 따라 자리 잡은 인물들

지금은 병천천이라 불리는 물길이 있다. 옛 기록에는 산방천山方川·병천幷川으로 불리던 목천에서 흘러온 물이다. 지금이야 아우내란 이름이 더 익숙하다. 천안시내의 물은 아산을 거쳐 서해로 흐른다. 반면 목천·병천의 물은 미호천에 합친다. 한남금북 정맥이 병천천을 통해 숨통이 트인 곳이다. 이 물길에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을 만난다.

천안시 수신면은 옛 청주 땅이다. 이곳에 조선 전기의 인물, 한명회韓明澮,1415~1487의 묘소가 있다.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인물인 만큼 꽤나 익숙하다. 무엇보다 세조의 왕위 찬탈로부터 연산군에 이르는 시기 동안 기록에 빠지지 않던 그였다. 그렇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를 옳게 보진 않았던 것 같다. 실제 무오사화 때 그의 무덤이 파헤쳐 관을 훼손하는 형벌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가 웅장한 그의 묘소는 이제껏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
 

커다란 석재를 그대로 쌓아올린 네모꼴의 호석과 독특하고 웅장한 문·무인석, 그리고 방금 만든 듯한 묘표는 묻힌 이의 위상을 말한다. 묘소 입구에 신도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2호)가 있고, 1995년 세운 충모사忠慕祠가 있다.

묘소를 알리는 표석을 지나 새로 지은 사당에 이른다. 사당 뒤쪽에 신도비가 있고 그 뒤 능선에 우람한 문인석이 지키고 있는 한명회의 묘소가 있다. 뒤쪽에 부인 묘소를 두고 그 바깥은 커다란 돌로 둘레를 쌓았다. 흔히 보지 못하던 구조이다.

얼마 전 ‘관상’이란 영화에 베일에 싸인 인물로 그려졌다. 한명회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이렇다 할 벼슬을 얻지 못하던 차에 수양대군을 만나 반전을 이룬다. 신숙주 등과 함께 김종서 등을 몰아낸 계유정란의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 세조의 왕위찬탈을 도와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 남이의 옥사를 처리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 성종 즉위의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 무려 네 차례나 1등 공신이다. 그래서 그를 훈구파의 대표로 꼽는다.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의 세자빈은 일가인 한확의 딸이다. 그가 유명한 인수대비이다.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여인이다. 그러나 의경세자는 결국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자 동생 예종(1468~1469 재위)이 왕위에 오른다. 그 예종의 비가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이다. 예종도 재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의경세자의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른다. 물론 성종의 비도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였다. 2대에 걸쳐 자매가 왕비가 된 경우이다. 공혜왕후는 왕자를 낳지 못하고 폐비로 쫓겨나, 사약 받아 죽은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다.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지 10년(1504),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많은 관료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를 갑자사화라 부른다. 두 딸을 왕비로 삼은 영화는 한순간에 간 데 없고, 이미 죽은 한명회는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처해진다.

이제는 천안을 대표하는 인물

한명회의 묘소를 나와 병천면 소재지에 이르는 길에 또 두 사람이 있다. 병천북쪽에 탐관오리를 혼낸 암행어사로 알려진 박문수朴文秀, 1691~1756, 그리고 한명회 묘 가까이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1783. 병천천이 시작하는 곳에, 또 그 물이 휘돌며 감싼 산자락에 두 인물의 자취가 있다. 홍대용의 생가터에는 2014년 천안홍대용과학관이 들어섰다. 궁벽한 시골 마을에 전위적인 건물이 들어선 연유다. 두 인물은 천안을 대표하는 역사인물이 되었지만, 그때 그들은 청주목 관할의 목천현에 묻혔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물길을 따라가면 독립기념관을 만난다. 그곳 가까이에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의 생가가 있다. 그는 10대 시절 문의 후곡리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할아버지에게 배우고 나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그였다.
 

동림산은 청주 서쪽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세종·천안과 경계를 이룬다. 그 꼭대기와 서쪽으로 뻗은 능선에 석축 산성이 있다.

청주 서쪽에 우뚝 선 동림산

물길은 산을 넘지 못하고 돌아간다. 아우내는 산간 곳곳의 물길이 합쳐 미호천에 들어선다. 미호천으로 경계를 이룬 서쪽에 뾰족하게 동림산(해발457.3m)이 있고 그곳에 산성이 있다.

산의 이름을 따 동림산성이라 부른다. 이곳 주위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이 속리산에서 나뉘어 한남금북정맥을 이루는데, 그 산줄기가 미호천을 끼고 굽이 돌아 이곳까지 이른다. 미호천 수계 바깥은 4~500m의 산줄기가 이어지며 한때는 국가 간 경계를 이룬 적이 있었다. 그 일부는 백제의 경계로서, 또 북으로 향하던 신라가 머물던 곳이었다.

동림산에 오르면 전망이 뛰어나다. 청주 도심은 물론 사방 가리지 않고 멀리 볼 수 있다. 자연스레 이곳엔 백제와 신라가 산성을 쌓아 그들의 강역을 지켜왔다. 지금 동림산은 천안과 경계를 이루며, 진천에서 나뉜 금북정맥이 남동쪽으로 뻗은 동쪽 끝자락이다. 주변의 물줄기는 동쪽에 남으로 흐르는 아우내가 진목탄에서 미호천과 합치고, 서쪽은 전의에서 모인 조천이 남으로 흘러 미호천과 만난다. 동서, 남북의 옛 길을 여지 없이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동림산성 성벽. 네모꼴로 다듬은 성돌을 수평을 맞추어 쌓았다.

물줄기처럼 지그재그로 이어진 산줄기에 옛 산성이 많다. 서쪽으로 망경산성과 운주산성이, 다시 고려산성에서 남으로 산줄기를 따라 증산성 등 좁은 지역에 대여섯 산성이 자리 한다. 동림산 동쪽은 목령산성이 있고, 보다 동쪽으로 장자성을 거쳐 진천·증평 경계의 여러 산성과 만난다. 동림산성을 기준으로 병풍처럼 산성이 펼쳐진다.

둘레 954.6m의 석축 산성. 옥산면 장동리 고개에서 임도를 따라 쉬 오를 수 있다. 꼭대기는 삼태기 모양이나 서쪽으로 길게 성벽이 뻗었다. 최대한 너른 공간을 확보하려던 의도였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지만 곳곳에 자취를 남기고 있다. 성벽은 앞쪽만 돌로 쌓고 뒤는 흙으로 채운 듯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성돌이 많다. 가파른 경사에 터를 마련하고 성벽을 쌓았을 옛 사람들의 고충은 무너져 내린 성돌 만큼 허무하다.

이곳 동림산 정상은 삼국시대의 경계일 뿐 아니라 최근까지 여러 변화를 그대로 남기고 있다. 정상에 있는 삼중리편입기념비는 1995년 3월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세웠다. 청원군 강외면 삼중리에서 연기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연기는 다시 세종시가 되었으니, 부강을 포함하여 여럿 세종의 일부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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