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의 인물탐구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백창화 괴산숲속작은책방 대표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박광자 옮김 청미래 펴냄

어린 시절, 내 독서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이 있다면 첫째는 국어 교과서이고 둘째는 만화책일 것이다. 집에 책이 없던 시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언니들의 중고교 국어 교과서를 보며 거기 실린 시와 소설을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그러고도 책이 고플 때면 동네 만화가게를 찾아 허기를 채웠다.

단순한 오락을 벗어나 만화가 진정한 내 인생의 책으로 등극한 때는 여고시절이었는데 그 계기가 된 첫 작품이 바로 ‘베르사유의 장미’였다. 일본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가 그린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기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을 담은 것으로 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결합한 ‘팩션’이다.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에게 왕비의 근위대장을 맡았던 남장 여자 오스칼이 전해준 판타지는 강렬했고 프랑스 왕정과 계급사회의 모순, 민중과 혁명같은 단어는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이 책을 필두로 ‘캔디캔디’ ‘올훼스의 창’ 같은 잊지 못할 명작 만화의 세계에 발을 디뎠으니 나의 여고시절은 이 만화들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가 슈테판 츠바이크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슈테판 츠바이크 라는 작가에 관심을 갖고 그의 책을 읽어오던 중, 이 작품을 만나게 된 것이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평전에 가까운, 허구가 아니라 객관적 자료들을 토대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생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매력 넘치는 인물 탐구와 작가의 빼어난 글솜씨 덕분에 단숨에 읽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권주의의 위대한 성녀도 아니었고 혁명의 매춘부도 아니었으며 중간적인 성격에 유난히 영리하지도 유난히 어리석지도 않으며 불도 얼음도 아니고 특별히 선을 베풀 힘도 없을뿐더러 악을 행할 의사 또한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인일 뿐이었다.”

불행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역사라는 위대한 창조주’는 춤추고 잡담하고 연애하고 웃으며 수많은 왕족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갔을 수도 있는 여인을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었다. 어린 아이일 때 궁정을 집으로 선물받고 성년이 되기도 전에 왕관을 썼던 이 여인의 삶이 비극으로 치달아가는 과정을 읽으면서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감옥 안에서 고독한 최후의 날들을 보내고, 민중들에게 끌어내려져 단두대 앞에 섰을 때 아름답던 미모가 백발로 변해 있었다는 이 여인의 마지막 시간들이 촛불 혁명에 의해 끌어내려져 수인번호를 달고 있는 어떤 여인의 모습과 계속 겹쳐졌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고독한 최후의, 가장 마지막 계단에 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책을 요구했고 충혈된 눈으로 글을 읽었다....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좁은 관처럼 축축하고 어둔, 이 천장이 낮은 방안에는 적막 영원한 적막 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왕비가 ‘도대체 넌 언제 너 자신이 될 거냐’며 끝없이 질책하고 교훈하던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불행과 절망을 겪으며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그 자신이 되었다고 작가는 쓰고 있다. 불행 속에서야 겨우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법이라고 덧붙이며.

혁명은 젊고 혁명의 피는 뜨겁고 거칠 것이 없다. 영광과 함께 상처도 있다. 아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주인공으로 운명을 부여받은 이들의 삶과 사랑, 불행과 절망,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숱한 거짓과 참의 이야기들은 시대를 초월해 가슴으로 부딪쳐온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원작을 읽고,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를 다시 읽어본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을 정도로 섬세하고도 훌륭하게 재창조해낸 일본 만화가의 작화가 놀랍다. 시대와 장르를 초월해 같은 꿈을 꾼 슈테판 츠바이크와 이케다 리요코, 두 작가에게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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