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 맞선 저항 충북에서도 치열…김재수 우진교통 대표 등 4명 구속
보안사 끌려가 20일간 모진 고문…5‧18국가유공자 보상금으로 장학회 운영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한국에 들어와 이를 취재한 독일 출신 위르켄 힌츠페터와 택시운전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 관객들의 눈시울을 자극하며 13일 현재 누적관객 700만명을 넘어섰다.(사진 쇼박스 캡처)

 

택시운전사인 주인공 만섭은 광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돈 워리, 광주. 베스트 드라이버”를 외친다. 이어 만섭은 “오케이! 렛츠 고 광주”를 다시 한 번 외친다.

그렇게 떠난 만섭에게 광주의 참 모습은 충격 그 자체다. 광주로 가는 길목은 군부대에 의해 통제됐고 거리는 폐허에 가까웠다. 군인들이 민간인에게 행하는 무자비한 폭력, 그리고 총격장면까지 어느 하나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만섭과 독일출신의 기자가 이방인의 눈으로 광주를 보았다면 특급수배자의 신분으로 5‧18과 같은 시기를 보낸 사람도 있다. 그중 한 사람이 당시 충북대학교 학생운동 지도부 중 하나로 신군부에 맞서 저항운동을 진행한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우진교통의 김재수 대표다.

그는 현재 광주민주화운동 국가유공자로 그때 받은 보상금을 기부해 울타리꽃장학회를 설립했다. 암울한 시대를 온 몸으로 받아낸 사람들이 겪은 당시 이야기를 살펴본다. (편집자)

영화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사진 쇼박스)

37년이 지난 5‧18은 현재의 젊은 세대에게는 낯설다. 아니 1980년대 그 시절 뜨거운 여름을 아스팔트 위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 퇴진’이나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외쳤던 세대조차 이제는 저물어가는 석양의 기억이다.

그랬던 1980년 오월 광주민중항쟁이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다. 한번은 학살의 최고책임자인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회고록으로, 한번은 두 명의 이방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영화 ‘택시운전사’(감독 장훈)를 통해서다.

13일 현재 택시운전사는 누적관객이 700만명을 넘어섰다. 이 기세면 조만간 관람객 1000만을 넘을 태세다.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의 절반은 눈시울을 붉힌다. 초등학교 5학년인 김어진 양도 영화를 보며 “군인들이 사람을 저렇게 때리고 죽일 수 있냐”며 눈물을 흘렸다.

영화의 시작은 가볍다.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흥겹게 부르는 주인공 만섭(송강호)의 모습에서 뒤에 벌어질 참혹한 5‧18의 참상을 예상하기는 힘들다. 영화는 뒤이어 등장하는 학생들의 시위 모습에서 시대상을 살짝 엿보게 해준다.

극중에서 독일 언론 출신 일본 주재기자 위르켄 힌츠페터가 한국에 입국하는 것은 5월 19일 이후.

영화에서는 거리 시위 그 다음날 힌츠페터 씨와 주인공 만섭이 곧바로 조우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는 약간 다르다.

당시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대학생을 중심으로 계엄해제와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봇물처럼 터졌다. 이렇게 전개된 시위는 5월 14일과 15일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15일을 기점으로 거리로 나섰던 학생들은 다시 교내로 돌아갔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라 불리는 학생운동 지도부의 결정에 의해서다.

1980년 5월 15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서울역앞에 모인 10만여명의 시위대(사진 5.18 기념재단)

‘서울역 회군’결정이 내려진 5월 15일에는 서울역 광장 앞에서 10만여 명 이상의 대학생 과 시민이 모였다. 시위대는 조속한 시일 내에 계엄을 해제하고 민주화를 추진할 것을 주장했다. 이날 밤 8시까지 시위는 계속됐다.

당시 시위대를 이끌던 심재철(당시 서울대 학생회장), 신계륜(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등은 현장에서 지도부 회의를 열었다. 계속해서 철야 농성을 해야 한다는 의견과 쿠데타의 빌미를 줄 수 있으므로 퇴각하자는 주장이 부딪쳤다.

회의결과 교외 시위를 계속할 경우 군이 개입할 명분을 준다하는 주장이 나오자, 심재철은 해산을 발표했다. 5월 16일 전국총학생회 회장단은 정상 수업을 받으며 당분간 시국을 관망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전국적으로 학교 밖 시위는 중단됐다.

 

속사정도 모른 채 “오케이! 렛츠 고 광주”

 

택시운전사인 주인공 만섭은 광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돈 워리, 광주. 베스트드라이버”를 외친다. 이어 만섭은 “오케이! 렛츠 고 광주”를 다시 한 번 외친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사진 쇼박스)

그렇게 떠난 만섭에게 광주의 참 모습은 충격 그 자체다. 광주로 가는 길목은 군부대에 의해 통제됐고 거리는 폐허에 가까웠다.

만섭은 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박수를 치는 시위대의 모습에서 대학생을 연상했지만 대학생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중 드물게 만난 대학생 구재식에게 “열사의 나라 사우디에 가 봐야 대한민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 알지”라며 내심 훈계했지만 그가 아는 대학생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힌츠페터와 함께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했다. 계엄군에 의해 무고한 시민들에 행해지는 폭력과 살육의 현장을 속속들이 들여다 봤다.

광주를 들여다 본 영화 속 만섭은 변했다. 힌츠페터를 버리고 혼자 있는 딸에게로 도망치듯 나왔던 만섭은 제3한강교를 부르며 결국 항쟁 속 광주로 방향을 돌린다.

택시 운전사 만섭 만이 운전대의 방향을 돌린 것은 아니다. 영화 속 이 장면에서 관객들도 이미 광주로 방향을 돌렸다. 극장 속 관객들의 눈시울은 이미 젖어 있었다.

 

5‧18과 청주 그리고 민주화의 봄

 

왜 하필 광주였을까? 그 진실에 대해 전두환‧노태우 등 학살을 지휘했던 신군부만이 제대로 알고 있을 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민주화의 봄’ 당시 진행된 계엄해제‧신군부퇴진을 외치는 저항의 몸짓에 위기감을 느낀 군사정권이 이를 타개하기 위해 광주에서 대량학살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 당시 모여였던 시위대만 10만여명. 대학생 외에도 시민들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시위는 서울‧광주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진행됐다.

이런 면에서 광주 뿐만이 아니라 전국 어떤 도시든 또 다른 광주가 진행됐을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민주화의 봄 당시 벌어진 대학생 교내시위(사진 5.18 기념재단)

5‧18 직전 ‘민주화의 봄’ 당시 진행된 충북지역의 모습은 어땠을까? 충북 지역에서도 청주대‧충북대‧서원대(당시 청주사대)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진행됐다. 충북민주화운동사(편찬 충북민주화운동사 편찬위원회)에 따르면 1980년 5월 청주대,충북대, 서원대 학생들은 학원민주화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교내시위를 펼쳤다.

5월 8일과 9일부터는 학내에 머물지 않고 교문까지 시위 영역을 넓혀나갔다. 5월 13일 충북대학교 학생들은 교문을 나와 가두시위를 전개하고 상당공원까지 진출했다. 이날 시위에서 5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됐다.

서울역 회군이 있던 5월 15일 서원대 학생들은 아침부터 학교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다. 충북대 학생들은 15일 아침부터 학생회관과 본관 앞으로 집결해 “유신철폐, 독재타도, “민주 쟁취, 신군부 반대” 등을 외치며 본격적인 시위를 시작했다.

이날 청주지역 각 대학교 학생들의 가두진출 시위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일부 학생들이 교문과 후문 돌파를 시도하는 사이, 많은 학생들이 학교 옆문을 뚫고 나가 모충동 고개로 진출했다.

모충동 고개를 넘어선 학생들은 무심천에 당도해 경찰과 대치하며 무심천 강바닥으로 내려섰다. 경찰 저지선을 뚫은 시위대는 1차 목표지인 청주약국, 국민은행 앞 남문광장으로 진출했다.

충북대학교 3000여 명의 시위대는 성안길에서 “유신철폐”, “계엄해제”, “신군부 반대” 등을 외치며 상당공원까지 나갔다. 서원대학교 학생 1000여 명도 청주약국 앞으로 진출했다.

청주대학교 학생 2000여명도 경찰 저지선을 뚫고 상당공원까지 진출했다.

 

청주의 특급수배자 우진교통 김재수 대표

 

1980년 당시 충북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던 김재수 현 우진교통대표는 충북대학교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이하 학자추) 위원장을 맡았다.

1978년 충북대에 입학한 김 대표는 충북지역 대학민주화 운동의 1세대로 80년 당시 ‘민주화의 봄’을 맞아 학내외 시위를 주도하다 5월 비상계엄령과 함께 검거된다.

김 대표가 말하는 검거 이후의 상황은 참혹했다. 수배가 내려진 김 대표 등 수배자의 얼굴은 포스터로 제작돼 다방에 배포됐다. 거리 담벼락에는 흡사 대통령 후보 벽보를 붙이듯 수배자의 전단이 부착됐다. 9시 뉴스에는 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하나 하나 방영됐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사진 쇼박스)

보안사에 끌려간 김 대표는 모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당시 수동에 있는 보안사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20일 정도 있었는데 처음 일주일은 무조건 맞기만 했다”고 밝혔다.

김재수 대표에 따르면 보안사는 세 종류의 물건을 가지고 고문과 폭력을 행사했다. 그는 당시 고문기구로 일명 ‘오파운드’라 불리는 곡괭이자루 같은 몽둥이, 발바닥만을 때리는 회초리 같이 생긴 물건, 전기고문장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보안사에 입소하자마자 옷을 홀라당 벗겼다. 이후 군복 상의만 주고 폭력을 행사했다. 잠은 보안사 지하실에서 신문 두 장만 주고 잠을 자게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중 발바닥 회초리가 가장 아팠다고 회상했다. 김 대표는 “나를 책상위에 무릎을 꿇리고 앉게 했다. 그러면 그들이 발바닥을 때리는데 60대를 넘어가면 온몸이 찌릿찌릿 전기가 오듯이 통증이 밀려왔다”고 전했다.

보안사 사무실안에는 책상하나만 있었다고 전했다. 또 한쪽 벽면은 유리로 되어 있는데 안에서는 밖을 볼 수가 없고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안에 있는 책상은 전기 고문장치였는데 당시 작동이 잘 안됐다”고 기억했다.

그는 “얼굴과 사타구니, 겨드랑이만 빼고 온 몸이 시커멓게 되도록 보안사로부터 고문과 폭력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보안사는 이런 고문을 통해 일본에 거주하는 큰 아버지등 친척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시위를 주동했다는 자백을 강요했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1심은 대전법원에서, 2심은 서울 국방부 건물에 있는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다행히 2심 군사법정에서 선고유예를 받고 8개월 만에 풀려났다.

김재수 대표 외에도 당시 당시 5월에 진행된 충북지역 시위로 대학생 3명이 구속됐다. 청주대학교 김용명, 충북대학교 민봉규, 그리고 청주에 머물며 시위에 가담했던 부산대학교 최종철 학생이 구속됐다.

 

노동자자주관리기업 우진교통 김재수 대표.

 

5‧18민주화 운동과 ‘울타리꽃’ 장학회

 

1995년 당시 김영삼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4개의 법률’을 제정됐다. 이때 제정된 법률에 의해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희생된 당사자와 당시 진행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거나 이후 광주학살 진상규명 과정에서 부당하게 투옥되거나 고문을 받은 사람에게 유공자로 인정하고 당시 피해에 보상을 진행했다.

현재 충북지역에서는 약 19명 내외의 인사가 이 법률에 의해 유공자로 지정됐다. 충북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었던 고 정진동 목사와 조순형 전도사, 김재수 대표, 김창규 목사 등이 이 법률에 의해 국가 유공자로 지정됐다.

김재수 대표는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지정되며 보상을 받은 2000만원을 기금을 장학사업에 기탁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울타리꽃 장학회’다.

2002년 울타리꽃장학회는 도내 민주화·시민운동 기여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지원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됐으며 이사장은 전 김정기 서원대학교 총장이 맡았다.

장학회의 명칭은 도종환 문화부장관이 지었고 기금 관리는 김병우 현 충북도교육감이 맡았다.

2003년 첫 장학금이 지급됐다. 2003년 첫 수여자로 전교조 해직교사로 교육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다 작고한 고 정영상교사의 자제와 평화택시 노조활동을 통해 800일간의 천막농성을 주도하는 등 노동운동에 앞장서온 해고노동자 오만균씨의 자제분이 선정됐다.

5‧18 광주민주화항쟁이 남긴 교훈은 매우 크다. 김재수 우진교통 대표는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민중들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로부터 받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보상금에 대해서 한 번도 내 돈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며 “울타리꽃 장학회는 5‧18 광주의 아픔을 잊지 않으려는 작은 몸짓이었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