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말을 탄 백제 무사武士

또한 다양한 무기류와 마구류는 당시 활발했던 백제의 군사활동을 말한다. 둥근고리 큰칼과 투겁창, 화살촉 등은 당시 군사들이 기본적으로 휴대했던 무기들이다. 또한 말재갈과 말걸이는 말을 탈 때 사용하던 것이다. 다수의 마구류들은 당시 신봉동 고분군에 묻혔던 전사들의 활동 반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전사의 무덤이 한성 근처가 아닌 청주에 집중된 이유가 궁금하다. 바로 충주 쪽으로 우회하여 공격해 오던 고구려군을 방어한 결과였다. 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듯 고구려는 충주에 거점을 마련하고 서로는 백제를, 남으로 신라를 압박했다. 4세기 후반부터 고구려와 충돌하기 시작한 백제로서는 동쪽으로 우회하는 고구려군을 청주를 기점으로 막고자 했던 것이다.
 

청주 2차 우회도로와 가경동 아파트 단지에서 확인된 가경동 유적은 널무덤과 저장구덩, 토기 가마터 등을 조사하였다. 대체로 신봉동 고분군과 같은 시기의 유적으로 청주지역 곳곳으로 백제문화의 확산을 보여준다.

자연스레 청주를 기반으로 하는 백제의 방어체계가 완성될 수 있었다. 특히 미호천을 따라 마련된 교통로를 막는 조처가 취해졌는데, 각처의 산성이 이를 말해 준다. 진천 대모산성은 백제가 쌓은 낮은 구릉 위의 산성으로 겹으로 이루어진 요새였다. 이곳 성벽 바깥에서 고구려 토기가 발견되면서 고구려군이 이곳을 거쳐간 사실도 알 수 있다. 증평 추성산성은 산 위에 판축기법으로 쌓은 토성이다. 북성과 남성으로 별개의 성곽을 쌓아 미호천 방면으로 압박해 오던 고구려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

멀게는 가야와 신라 지역까지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5세기 후반 고구려군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군까지 합세하는 연합군을 이루었던 기록을 뒷받침한다.

우회도로 공사 중 확인 조사된 명암동·가경동유적(충청북도 기념물 제120호), 오창의 주성리유적도 신봉동유적과 같은 시기에 만든 무덤으로 당시 청주지역에서 전개된 백제의 지방통치와 대외활동의 단면을 알 수 있다.
 

주성리유적의 돌방무덤은 여러 차례 사용된 흔적이 있다. 마지막에는 신라 토기를 부장한 인물이 묻혀 6세기 후반 쯤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했다는 근거로 본다.

청주지역 백제 고분의 축조는 6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청주 주변 전역으로 확대되던 무덤의 축조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조치원 방향으로 점차 후퇴되는 양상을 보인다. 551년 진흥왕의 낭성娘城 순수와 554년 관산성管山城, 옥천 전투의 패전으로 백제는 크게 위축되었다. 아마도 이때를 전후하여 백제군의 주력이 청주를 떠나고 그 자리를 신라가 차지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청주지역의 백제 산성은 당시 청주를 중심으로 한 행정단위를 가늠할 수 있다. 곧 청주 와우산성과 부모산성, 목령산성 등 인근 성곽 유적은 주변에 펼쳐진 무덤과 함께 백제 지방통치의 범위를 생각할 수 있다. 역시 무심천과 미호천이 미치는 지역에서 비슷한 문화양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문헌기록 등에서 당시의 땅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주성리유적의 돌방무덤으로 여러 차례 사용된 흔적이 있다. 마지막에는 신라 토기를 부장한 인물이 묻혀 6세기 후반 쯤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했다는 근거로 본다.

최근 옥산지역에서 대규모의 백제 가마터를 조사하였다. 모두 6기의 가마인데 5세기 때의 백제 토기를 생산하던 곳이다. 가까운 청주 일대의 무덤과 집터 등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시기 차이가 거의 없다. 특히 이곳에서 만든 토기는 영산강 유역과 가야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곳까지 토기를 유통했거나 제작기술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옥산 오산리 4호 가마 출토유물. 가마터의 유물은 대부분 깨진 상태로 출토된다. 가운데 장군처럼 다른 지역에서도 출토되는 유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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