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가장 오래된 네모꼴 토성

도심을 가로지른 무심천은 미호천과 만나 광활한 평야를 이룬다. 이곳 하천 가까운 구릉에는 청주 역사의 여명을 여는 여러 유적과 만난다.

정북동토성井北洞土城(사적 제415호)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평지 방형 토성의 사례로 꼽힌다. 당시 금강 지류인 미호천을 이용한 활발한 교류를 엿볼 수 있다. 토성의 기본적인 형태는 중국의 도성제를 본땄다. 동서남북 네 곳에 통행문을 내었고, 북문과 남문은 어긋나게 쌓은 초기 옹성의 형태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정북동 토성. 북쪽으로 미호천이 흐르고 강변에 쌓은 네모꼴 토성이다.
정북동토성 동벽에서 확인된 기둥구멍으로 1.1~1.7m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고 판벽을 덧대 흙을 다져 쌓았다.

전체 둘레 675m로, 동벽 185m·남벽 155m·서벽 165m·북벽 170m, 잔존 높이 4m이다. 문터 한쪽에 곡성曲城을 두었고, 문터와 모서리의 사이마다 하나씩의 곡성이 있다. 또한 모서리 자체가 곡성처럼 각루를 이루는 정형성을 보여 준다.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청동기시대의 문화층 위에 3세기 전후 현재의 모습으로 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토성 쌓던 사람들의 무덤

정북동토성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무덤 유적으로는 청주 송절동·봉명동·송대리유적과 진천 송두리유적 등이 있다. 모두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 유역에 분포한다.

송절동·화계동 일대의 구릉은 대부분 원삼국시기의 무덤과 집터가 밀집되어 있다. 송절동유적에서는 널무덤과 덧널무덤이 조사되었는데, 백제가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이전 지역 문화의 양상을 알 수 있다.
 

봉명동유적의 어울무덤[合葬墓]으로 구덩이를 파고 한쪽에 치우쳐 관을 놓고 반대쪽에 유물을 부장하였다.
봉명동유적 출토유물. 송절동유적에 비해 쓰임새에 따라 다양한 토기가 만들어졌다.

봉명동유적은 움무덤 200여 기가 조사되었다. 만든 때는 송절동유적과 신봉동유적의 중간에 해당한다. 3세기 중후반에서 4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신봉동 고분군과 함께 중부지역 최대 규모의 무덤 유적이다.

송대리유적에서는 원삼국~백제시대에 이르는 토광묘 74기가 조사되었다. 무덤의 형식과 특징은 대체로 이웃한 청주 송절동유적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충남 천안-공주 일원에서 주로 발견되는 주구토광묘 4기도 함께 발견되어 미호천 건너편과 차이가 있다. 무덤에서 나온 널을 방사선 연대측정한 결과 B.C.30~A.D.220년으로 나와 유적의 대략적인 편년을 확인할 수 있다.

미호천의 지류에 해당하는 백곡천변에 위치한 진천 송두리松斗里유적이 있다.

이곳 덧널무덤에서 영남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던 쇠뿔손잡이단지組合式牛角形把手附圓底長頸壺가 출토되었다. ‘와질토기瓦質土器’라 불리는 이 토기의 발견은 주민의 이동 또는 문화적 교류와 관련있다. 송두리유적은 같은 시기 인근의 진천 삼룡리·산수리유적의 토기 가마터 유물과도 다르다.

삼국 초기 청주의 문화양상은 전통적인 양식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적 요소가 함께 나타난다. 흔히 중국계, 혹은 낙랑계 요소가 보이는데 한강 하류 백제중심지의 문화와도 차이가 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 점차 백제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난다. 아마도 이때쯤 청주지역은 점차 백제의 직접적인 지배체제에 흡수된 것 같다.

하지만 아직까지 삼국 초기에 나타나는 청주지역 고대 문화의 속성을 꼭집어 말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문화 패턴에도 불구하고 소국小國이나 지역 집단의 특성을 분명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 시기 청주의 문화 양상은 다양한 문화적 속성의 출입에 따른 복잡성을 더하는 특징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강 하류를 중심으로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백제는 4세기에 이르러 국가적 면모를 새로이 한다. 특히 4세기 후반에 이르러 활발한 정복활동을 보여준다. 371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삼국 중 최강자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이때 백제의 군사활동은 현재의 경기지역을 넘어 영서, 호서, 호남, 영남 서부 일대로 확대되었다.

청주지역도 4세기 무렵 백제의 직접 지배하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초기의 무덤 유적에서 점차 백제적 요소가 강하게 보이고, 자리를 옮겨 무덤을 만드는 등 새로운 변화가 보인다. 청주는 『삼국사기』에 이미 낭자곡성·낭비성으로 불린 곳이다. 금강 중상류 일대의 여러 유적에서 이미 초기 백제의 요소들이 확인되었고, 4세기 이후 완전히 백제의 중앙 양식과 문화적 속성이 연결된다.
 

신봉동 고분군의 덧널무덤. 1m 이상 깊게 파고 강돌을 바닥에 깔았다. 무덤과 부장 칸을 달리 하여 만들었다. 덧널 바깥 흙을 되메울 때도 판축기법으로 쌓았다.
<대동여지도>를 바탕으로 구성한 5세기 후반 삼국 관계도이다. 북쪽으로부터 압박해 들어오는 고구려군을 신라와 연합하여 미호천 유역에서 저지하고 있었다.

4~6세기 들어 청주지역에는 백제 유적이 넓게 확대된다. 송절동유적에 연이어 형성된 구릉은 점차 높아지면서 봉명동유적과 신봉동 고분군(사적 제319호)으로 이어진다.

신봉동 고분군은 백제의 군사활동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이다. 현재 7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성격이 상당 부분 밝혀졌다. 돌방무덤[石室墳]을 비롯 300여 기의 돌덧널무덤과 움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주로 전사戰士 집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출토되는 유물은 주로 토기와 무기류, 마구류 등이다. 이곳 토기는 백제토기 연구의 기준을 제시할 정도로 많은 양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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