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오창에서 퍼져나간 경주이씨

오창 일대에서 옛 기록에 자주 보이는 경주이씨가 있었다. 우리에겐 임진왜란때 활약한 이시발李時發,1569~1626이 잘 알려져있다. 우리 지역의 경주이씨는 대개 익재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 말의 인물로 뛰어난 성리학자이며, 정치가로 유명하다. 그의 후손 중 이공린李公麟, 1437~1509이 청주로 낙향하였다.
 

미원면 가양리의 수락영당. 익재 이제현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

이공린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의 사위라는 이유로 벼슬이 막힌데다, 다시 아들 이원李黿, ?~1504으로 인해 참화를 겪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아들이 참형되고 자신은 해남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났으나 아들을 데리고 청주로 내려온 것이다. 그의 아들들은 학문이 뛰어나 팔별八鼈로 불렸다. 이곳엔 수락영당水樂影堂이 있다. 수락영당은 조선 광무 2년(1898)에 진천 양호사에 봉안했던 익재 이제현의 영정을 이곳으로 옮겨 모신 사당이다.

이시발 묘소 앞의 묘표. ‘증정경부인안동김씨부좌贈貞敬夫人安東金氏祔左’라 하였다. 안동김씨는 김사렴의 후손 김도의 딸이다.

이원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넷째 이발李潑은 제천에 살던 숙부 이타李鼉에게 양자로 보내졌다. 이발과 그의 두 아들 이경윤李憬胤·신윤慎胤 형제도 제천에 거주하였다. 이경윤은 자신의 아들들이 제천에서 배울 것이 없다 하여 청주 오근리梧根里에 있던 작은할아버지 이잠李潛에게 보내어 수학토록 하였다. 이때 이대건李大建도 오근리로 옮겨 살면서 호를 오촌梧村이라 하였다. 이대건이 오근으로 옮겨온 이유는 이곳이 부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부인 안동김씨는 김사렴의 후손 김도金燾의 딸이다.

또 하나의 성씨가 (구)안동김씨의 터전으로 들어온 셈이다. 그런데 이대건은 불과 25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시발은 이대건의 묘를 진천으로 옮겨가며 이때부터 경주이씨는 주로 초평에 살았다. 초평은 이시발이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받은 땅이다. 그래서 그들을 초평이씨라 부른다.

이때 이시발의 동생, 이시득李時得은 초평으로 가지 않고 문의로 옮겨갔다. 이시득은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그의 묘갈은 송준길宋浚吉이 찬하였는데, 이때까지 이들은 서인西人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런데 이시득의 손자 이인형李寅馨·인빈寅賓 형제는 신항서원莘巷書院을 두고 노론과 대립하였다. 신항서원에 누구를 모시고 위에 두느냐를 두고 향전鄕戰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 지역 경주이씨가 소론으로 드러난 순간이다. 중앙의 붕당정치가 지역에서도 그대로 재연되었다.

신항서원은 1570년(선조 3) 경연慶延·박훈朴薰, 1484~1540·김정金淨, 1486~1521·송인수宋麟壽,1499~1547를 제향하기 위해 처음 세웠다. 모신 인물들이 지역의 대표적인 효자와 사화士禍로 화를 입은 이들이다. 이후 1642년(인조 20) 한충韓忠, 1486~1521, 1650년(효종 1) 송상현宋象賢·이득윤李得胤을 더불어 제향하였다. 한충 또한 기묘사화와 관련된 인물이고, 송상현은 임진왜란 순절 충신, 이득윤은 지역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그런데 1656년 이이李珥, 1536~1584·이색李穡, 1328~1396을 모시면서 논란이 시작된 것이다. 1660년(현종 1) ‘신항서원’이라 사액을 받을 때까지는 여러 문중이 협력하였다. 그러나 1665년 이이를 제일 위에 따로 모시게 되면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바로 위차시비라 한다. 이이는 서인-노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며 이색보다 앞에 모시면서 논란이 시작된 것이다.

일찍이 이이와 이색을 모시자는 주장은 충주지씨 지약해池若海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송시열의 외족이며 문인으로, 서인-노론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여기에 지역의 다른 성씨가 반발하며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논란은 1685년(숙종 11) 송시열이 쓴 묘정비를 세우며 일단락된 듯하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지역은 노론과 소론이 완전히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신항서원은 청주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이곳을 둘러싼 논란은 중앙과 연동되어 이루어진 정치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초평 용정리 묘소 맞은 편에 오촌 이대건과 그의 아들 벽오碧梧 이시발의 신도비를 함께 모아 쌍오각이라 하였다.

오근진에서 오창으로

지금의 오창은 읍사무소가 있는 곳과 아파트가 들어선 신 도심으로 나뉜다. 옛 읍소재지는 흔히 오근장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충북선 기차역이 들어선 미호천 남쪽을 오근장이라 한다. 오창의 연원은 오근진梧根津이다. 지금의 팔결교에 나라에서 관리하던 나루[津]가 있던 것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오창읍소재지 금정아파트 자리가 옛 북창北倉, 오근창이라 한다. 나라에서 세곡을 관리하던 곳이다.

국도 17번이 지나는 이 길은 진천과 안성, 용인을 거쳐 서울로 가던 길이었다. 자연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곳이었다. 아파트촌이 보다 서쪽으로 옮겨가 중심을 이루지만 여전히 이 길로 북쪽을 향한다. 백제가 미호천을 지키던 목령산성이 있고, 이 길을 따라 북쪽을 향하던 신라군이 거쳐간 곳이다. 고려 말 조선 초기 청주에 들어온 (구)안동김씨로부터 여러 성씨가 터전을 일구었다.어쩌면 초라해 보이는 구 읍에서 너른 뜰을 터전으로 삶았던 옛 사람들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신항서원(충청북도 기념물 제42호)은 청주지역 최초의 서원이다. 처음 이곳 지명을 서 유정서원 有定書院이라 하였다. 삼문을 들어서면 묘정비-강당인계개당繼開堂-사당인 구현사九賢祠가 나란하다.
신항서원묘정비廟庭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50호)은 강당인 계개당 앞에 있다. 창건의 내력과 사액 , 배향인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1685년 송시열이 찬하고, 서원현감 조형기趙亨期가 썼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전액을 썼다.
팔결다리에서 본 미호천 하류. 미호천에 의지하여 살던 사람들의 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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