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연과 소음, 도로사정 때문에 못 걸어…걷기 소망이 급기야 갈증으로

안남영의 赤道일기(17)
전 HCN충북방송 대표

‘걷고 싶은 거리’라―. 그런 거리가 따로 있는 줄 몰랐다. 그저 음악과 사색을 즐길 수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고 믿었다. 한데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에 온 뒤로는 걷기에 대한 소망이 갈증으로 변했다. 길이 존재하되 내가 다니는 길은 ‘걷고 싶지 않은 길’뿐이어서다.

자카르타에서 두 달 간 현지 적응훈련을 받을 때가 생각난다. 통근하면서 버스를 타기 전후로 각각 15분가량 걸어야 했다. 정말 피하고 싶은 길뿐이다. 불편, 불결, 소음, 매연, 위험 등 참거나 조심해야 한다. 특히 보도가 따로 없는 구간이 많아서 오토바이 질주가 위협적이다. 그 중 폭이 50㎝ 정도밖에 안 되는 곳이 있다. 여기를 걷다 보면 수시로 차도로 내려서야 한다. 교행이 안 될 뿐더러 중간에 보도블록이 망가져 통행이 어렵거나 큰 나무가 한가운데 심겨져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가 원래 없던 곳에 배수로를 정비하면서 인도를 설치하는 공사 현장. 그러나 연계성이 떨어져 걷다 보면 ‘끝’이 나온다.

큰길의 인도라고 해서 나은 것도 없다. 블록이나 콘크리트 노면에 여기저기 들뜨고, 꺼진 곳이 허다하다. 걷다 보면 차량 진입 금지봉, 벤치, 육교(교각) 같은 구조물에다 말끔히 제거돼야할 나무 밑동이나 낮게 드리워진 나뭇가지 등도 많아 성가시다. 노점상이나 포장마차가 인도 전체를 차지하는 명소(?)도 많다. 인공구조물은 그 시공 불량 때문에 더 짜증스럽다. 차량진입 금지봉은 필요 이상 높거나 촘촘하게 설치돼 마른 사람도 몸을 틀어 통과하거나 배낭을 추슬러야 할 정도다. 어떤 곳 육교는 계단 폭이 인도 폭과 같아 길을 틀어막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철제 벤치가 그늘이 아닌 뙤약볕 아래 군데군데 설치돼 있어 그 위치와 목적이 의아하다.

또 인도에서 공사를 해도 아무런 표지판이 없다. 길가 쓰레기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 옆 배수로의 잡탕 오물들은 가위 ‘시각 테러’에 가깝다. 교육 중 들었던, “도로가 침수되더라도 피부병 걸리니 발을 적시지 마라”는 경고의 이유를 실감케 한다.

힘들어도 웬만하면 걷기 실천

자카르타시는 안 그래도 좁은 인도에 인공 구조물과 나무들이 불편을 준다.

중소도시인 이곳 반자르마신은 더 열악하다. 지금도 가끔 비가 오면 걸어서 통근한다. 도보로 15분 걸리는 통근길은 4차로인데, 아예 인도가 없다. 그나마 있는 공간도 주차장, 물건 적치장, 풀밭, 포장마차 등 용도가 다양하고, 비만 오면 웅덩이로 변해 행인―물론 나뿐이지만―을 차도로 내모는 곳도 많다. 걷다 보면 날선 돌부리가, 웅덩이가, 풀밭이, 도랑이 발길을 끊어 놓는데, 그렇다고 아래만 보고 걷는 것도 위험하다. 늘어진 나뭇가지도 피해 다녀야 한다. 한 번은 걷다가 무언가에 부딪혀 안경을 떨어뜨린 일이 있다. 보행공간을 가로질러 현수막을 낮게 고정한 철삿줄에 그만 얼굴이 걸린 것이다. 다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는데, 바로 자전거를 사게 됐다.

이보다 걷기의 즐거움을 뺏는 건 매연과 소음이다. 오토바이 매연으로 인한 미세먼지 공포를 여기서도 느낄 줄 몰랐다. 게다가 담배 피우는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많아 신호대기 중인 오토바이 행렬 옆을 지날 때마다 짜증스럽다. 게다가 승용차보다 심한 오토바이 소음 때문에 걸을 때 이어폰을 사용할 수가 없다. 거기에 작열하는 적도의 땡볕은 또 어떤가?

이렇듯 편안한 걷기가 힘드니 음악은커녕 사색도 다 언감생심이다. 현지인 선생들은 그래도 웬만하면 걸어 다니려는 나를 이해 못하는 눈치다. 내 눈엔 걷기의 즐거움을 알려들지 않는 그들의 무지가 딱해 보이는데. 이들은 교문에서 200m도 안 되는 식당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 ‘길 아닌 길’을 걷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하기야 이해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더위와 직사광선 때문이다. 낮에 10분만 걸어도 땀 범벅이 되니 말이다. 아무튼 오토바이의 문전착발(門前着發) 편의성에 익숙해진 탓인지 보도 정비가 늘 후순위 정책으로 밀려난 결과 걷고 싶은 길은 극히 드물다.

‘걷기의 재발견’이라―. “걷기만 해도 인생이 달라진다”라는 말은 TV에서 어느 발건강 전문가한테서 들었는데 이곳에서 길을 갈 때마다 뇌리에 맴돈다. 걷는다는 게 어쩌면 내 몸의 신체리듬 위에서 정신과 육체가 하나로 동조되는 과정이렸다. 걷기를 생활화해 본 적이 없지만 몇 번 장시간 걸어 본 얕은 경험으로도, 걷기는 절대 고독과 절대 자유를 동시에 체험케 하고 혼돈의 내면을 리셋함으로써 내적 성장에 뭔가 작용함을 느낀 바 있다.

‘걷는다’는 것의 미학

4년 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가서 칸트가 걸었다는 ‘철학자의 길’을 가 본 적 있다. 참 고즈넉한 게 걷고 싶은 길이 바로 이런 곳임을 직감했다. 그곳에서 위대한 정신, 칸트주의가 태어난 것도 우연이 아니리라. 소설 ‘와일드’의 작가 셰릴 스트레이드가 4,000㎞를 걸으면서 절망의 늪에서 희망을 건져 올린 유명한 실화는 영화로도 나왔다고 한다. 히말라야 언저리에서건, 한 달 걸리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건, 곰과의 대치도 각오해야 하는 6개월 코스 미국 애팔래치아 트레일에서건 제대로 도전한 사람들이 저마다 책을 내는 이유는 한 가지. 바로 거기엔 자신의 메마른 인생을 적시는 눈물과 감동이 있기 때문이리라.
 

길옆에는 대개 크고 작은 배수로가 있는데, 괸 물과 오물이 혐오감을 줄 정도로 더럽다.

생각건대 걷기 예찬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 ‘느림의 미학’ 덕이 아닐까 한다. 걷는다는 것은 순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걷는 사람은 결코 쫓기지 않는다. 걸으면 숨고르기를 할 수 있다. 걸으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다. 오감을 오롯이 생생히 작동시킬 수 있고 멀티태스킹도 가능하다. 천천히 걷는다면 누가 발을 걸어도 넘어지지 않는다. 가다가 멈추기도 쉽다.

돌아보면 지금껏 멋모르고 달리며 살아온 느낌이다. 그 뜀박질 인생이 여기 와서야―많이는 못 걸어도―걷기의 가치를 좀 알게 됐다고나 할까? 그래서 천국이 저기 있어 언제 문이 닫힐지 모른다 해도 걸어서 가리라 다짐해 본다. 사실 뜀질이 아닌, 진정한 걷기의 참뜻을 알기 위해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자원한 건 아니다. 그런데 내가 가고 있는 길과 걸음질이 마치 그걸 실천하는 게 아닌가 싶어 지금 이 시간이 참 소중하다. 이점에서 열악한 걷기 환경이 고맙기조차 하다. 다만 임기 만료 4개월 전인 이 시점에 냉정히 평하면 무한사랑과 인내를 다짐했던 초심이 이유야 어떻든 약해진 게 좀 걸린다. 또 의욕에 비해 성과가 미진한 것도 아쉽다.

어쨌든 그런 내게 이곳 반자르마신市 당국이 걷고 싶은 길을 허하면 좋으련만. 운동장, 공원, 대학캠퍼스에서도 거닐기 맞춤한 공간 찾기가 쉽지 않으니…. 하지만 조금씩 희망적인 데다 내게 새삼 교훈을 일깨워 준 이곳이 사랑스럽다. 귀국하면 마음껏 걸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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