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70년대의 중동전쟁을 말할 때 꼭 단골로 끼이는 말이 하나 있다. 전쟁이 나자마자 아랍과 이스라엘의 외국 유학생들이 동시에 짐을 쌌는데 한쪽(아랍)은 징병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한쪽(이스라엘)은 스스로 조국으로 날아가 전장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는, 소위 국민성에 대한 비교다. 물론 이는 조그만 나라 이스라엘이 거대 아랍권에 맞서 생존을 이어가는 민족적 저력을 미화하는 말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에 피의 보복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TV를 통해 아주 흥미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허리에 폭탄을 둘러 맨 팔레스타인 미소년, 소녀들의 자실테러 의지에 순간적으로 오버랩되는 예루살렘 재래시장 상인들의 상기된 모습이다.
테러는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다중이 집결된 장소를 선호한다. 때문에 이스라엘 서민들이 생계를 꾸려 가는 재래시장은 이들 테러단의 좋은 목표가 됐고 실제로 이미 몇번 피해를 입었다. 이곳 재래시장에서 최후를 맞으려는 팔레스타인 자살테러단의 위협이 끊임없이 계속되는데도 막상 죽음에 노출된 이스라엘 상인들의 반응은 의표를 찔렀다. 방송에 나타난 한 상인의 말은 이렇다. “물론 우리도 죽음이 두렵다. 그러나 내가 먼저 이 자리를 떠나고 그 뒤를 다른 사람들이 잇는다면 이는 결국 시장을 잃는 것이고 더 나아가 나라를 빼앗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공포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런 일이 서울 남대문이나 동대문시장에서 벌어진다면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 궁금하지만 불문가지다.
미국에 신제국주의를 부추긴 9.11 비행기테러는 한편으론 세계가 미국을 새롭게 인식하는 한 계기도 됐다. 느닷없이 모든 건물에 성조기가 나부끼고, 프로선수들의 유니폼과 모자에 별문양이 새겨지는가 하면 하다못해 갱단들의 제복(?)에도 미국기가 그려졌다. 세계인들이 주목한 것은 위기상항에서 그들이 보여준 상호 믿음과 일체감이다. 비록 안톤 오노가 보여준 헐리우드 액션, 쇼맨십이라도 말이다.
지난 외환위기 때 우리는 전국민 금모으기 운동으로 역시 민족적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끔찍하다. 골목의 개들도 서로 물어뜯어야 자연스럽게 보이는 험한 세상이 됐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나 지방의원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서로 다를게 하나 없다. 기껏 서약을 해놓고 경선 불복을 밥먹듯이 하는데도 이를 바라보는 국민의 의식이 너무나 무감각하다. 뭇 여성을 농락한 호색한이라도 적당히 기회를 보다가 다시 대중앞에 나타나면 열렬히 환영받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가 자신이 한 일에대해 진정으로 속죄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급기야 카드빚에 쪼들리던 20대들이 불과 이틀 사이에 다섯명의 부녀자를 살해했다. 마치 파리떼를 때려 잡듯 사람들을 죽였다. 원칙이 실종되고 비정상이 정상으로 비쳐지는, 아주 더러운 사회가 된 것이다. 하기사 굴뚝같이 믿었던 대통령마저 자식들을 저렇게 만든 마당에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찢어질대로 찢긴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해야 하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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