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살아 돌아온 조선 성종 때의 기록 <표해록>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표해록-조선 선비 중국을 표류하다 최부 씀, 김찬순 옮김 보리 펴냄.

좋지 않은 바람의 기미를 무릅쓰고 돛배 한 척이 제주 별도포(지금의 제주시 화북동)를 떠났다. 배에는 최부와 아전, 군인 등 일행 43명이 타고 있었다. 문신 최부는 전 해 9월에 추쇄 경차관으로 부임했는데, 부친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주 본집에 상을 치르러 가는 길이었다.

뱃길은 급한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거친 풍랑을 만난 배는 속수무책으로 표류했다. 밤낮으로 방향이 바뀌는 바람을 따라 열흘 밤낮을 떠다닌 끝에 중국의 외딴섬에 닿았으나 해적을 만나 가진 것을 몽땅 빼앗기고 노와 돛대도 없이 다시 바다 한가운데 버려졌다. 또 다시 죽을 고비를 거듭 겪고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중국 절강성 태주 지방에 닿았다. 왜구로 의심하는 그곳 관리들에게 조선 관원임을 증명하고 겨우 살 길을 열고, 그들의 보호를 받아 소흥·항주·소주를 거쳐 북경까지 가고, 육로로 요동을 지나 6월 4일 비로소 압록강을 건넜다.

행로가 자세하기도 하거니와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한 소설 같아서 아무래도 거짓말이 아닌가 싶은 이 이야기는, 조선 성종 19년(1488) 윤정월 초부터 6월 초까지 그들이 겪은 실화다. 5개월 동안 사지를 떠돌다 살아온 사람에게 무엇보다 가혹한 일은 아마도 일지를 적어 올리라는 임금의 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부친상을 치르러 가야 하는 사람이 일기 찬하는 일을 마치도록 청파역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그간의 일을 적어 내라는 임금이나 만사를 미루고 글을 쓰고 있는 신하이나 참 어지간한 사람들이다. 하여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에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3대 중국 여행기로 꼽히는 <표해록>은 그렇게 세상에 남겨졌다.

그들은 한마디로 막막했다. ‘사나운 파도가 갑자기 높이 솟아 뜸으로 덮쳐들어 사람 머리와 얼굴에 물벼락을 들씌우니 다들 눈을 감고 뜰 수가 없었다. 선장도 사공도 다 통곡할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윤정월 7일)― 이렇듯 죽음의 공포에 맞닥뜨려서도 최부는 책임자로서 의연하게 방향을 잃지 말라, 키를 바로 잡아라 일일이 군속들을 단속하는 한편 ‘당신이 물색 모르고 배를 띄워 이렇게 됐다’며 어차피 죽는 거 편히 누워서 죽겠다고 뻗대는 군인들을 달래고 고무했다.

죽음의 기록 아닌 여행기

“파도가 제아무리 험악하고 사태가 절박할지라도 배가 이렇게도 단단하여 결코 쉽사리 부서지지는 않을 것이니 물을 잘 퍼내기만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윤정월 7일) “생사의 기로에서 고생을 같이하니 정이 육친이나 같다. 앞으로 서로 보호해 나가면 살아 돌아갈 것이니 너희는 이를 명심하여 환난을 만나거든 함께 구원하고 밥 한 그릇이라도 얻게 되면 나눠 먹을 것이며, 병이 나면 서로 돌보아 주어 한 사람도 죽는 이가 없게 해야 한다.”(윤정월 17일)

이 같은 일관된 태도와 격려는 실제로 힘을 발휘해서 일행을 감복시키고 혹독한 바다의 시련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최부는 글 읽은 선비로서 절의를 잃지 않았고, 조선 관원으로서 당당함과 예절을 보였으며, 높은 인격과 깊은 학문으로 중국인들의 경탄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와 인물을 자랑하여 위신을 높였고, 중국 관리가 지친 일행을 때리고 핍박할 때는 항의하여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표해록>은 필자가 경유한 지역의 문물제도, 생활풍속, 인심 들을 낱낱이 서술함으로써 문헌적 유산으로서도 가치가 높다. 실제로 그는 수차(水車)를 이용해 논에 물을 대는 것을 보고 그 제작법을 자세히 물어서 귀국 후에 만들어 바치기도 했을 정도이다.(성종실록, 성종 19년 8월 4일)

그들은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 그 길이 생사를 넘나드는 행로였다고 해도 결국 살아서 돌아왔다. 그리하여 <표해록>은 죽음의 기록이 아닌 여행기가 되었다. 극한의 순간에서도 ‘하늘이 하는 일이니 두고 보자’는 식의 숙명론을 펼치거나 모두 살아서 돌아온 것이 ‘어진 임금의 은덕’이라고 설교하는 것들을 두고 나오는 비판도 살아서 돌아왔기에 듣는 말이다.

선조들은 그들 식으로 표류를 끝냈는데, 정작 대명천지 21세기를 살아가는 후손들의 세월호는 한밤중을 헤매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바람도 없는 우리 바다에서 대낮에 그 큰 배가 가라앉고, 300명이 넘는 생목숨을 잃고, 영문도 모르고, 배를 3년 동안이나 물속에 처박아두고,……. 이것을 표류가 아니면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하나. 500여 년 전의 표류기를 읽으며 그 억센 의지와 신념을 부러워하는 심정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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