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작가 프리츠 오르트만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나경 전 꿈꾸는책방 점장

곰스크로 가는 기차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북인더갭 펴냄

 ‘나’는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멀고도 멋진 도시, 곰스크에 대해 들은 뒤 가 본 적도 아는 것도 없는 도시를 늘 동경했다. 자라는 내내 그곳에 가는 것을 유일한 목표이자 운명이라고 여긴 ‘나’는 결혼 직후 가진 돈을 탈탈 털어 곰스크로 가는 기차표 두 장을 산다.

그러나 몬트하임이라는 간이역에서 -어쩌면 아내의 의도에 따라- 기차를 놓치고 결국 그곳에 짐을 풀게 된다. 이후 다시 곰스크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찾아왔으나 그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지 못한다. 기차가 오지 않아서, 기차표가 유효기간이 지나서, 아내가 임신을 해서 등등.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마을 학교 선생이 되어 세월을 보내는 ‘나’는, 그러나 언젠가는 꼭 곰스크에 가겠다는 생각으로 돈을 모으고 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 곰스크로 가겠다는 계획이 좀 더 뒤로 밀려났지만 말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본국에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독일 작가 프리츠 오르트만이 쓴 단편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줄거리다. 90년대 초 대학가에서 독문과를 중심으로 번역본이 돌면서 알려진 이 소설은 PC통신 등을 통해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2004년에 방송사 단막극으로 만들어져 대중들에게 각인되었지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프리츠 오르트만이 발표한 또 다른 단편소설 7편과 함께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됐다.

드라마로 내용을 먼저 알게 된 나는 책이 출간되고 나서야 소설을 읽었다. 드라마와 소설 사이 6년이라는 시간이 있었고, 그만큼 내가 처한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였을까?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처음엔 현실에 발붙이지 못한 채 스스로와 주변을 불행하게 만드는 ‘나’가 답답하게 느껴졌다면, 이후엔 끝없이 곰스크만을 갈망하며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하고 경계의 삶을 사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놓고 고민하다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지금은, 곰스크로 가기 위해 여전히 돈을 모으고 있는 ‘나’를 응원하는 중이다.

간이역과 곰스크, 선택은 ‘나’의 몫

소설 속 ‘나’에 대한 시선이 다르듯, ‘곰스크’ 또한 읽는이에 따라,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이루지 못한 꿈일 수도, 암울한 시대에 사는 이들이 도달하고픈 유토피아일 수도 있다. 또한 누군가에게는 파랑새를 찾아다니느라 내 옆의 행복을 못 보는 어리석은 자의 헛된 욕망으로 보일 수도 있다. ‘곰스크’가 이루지 못한 꿈이라 생각한다면 현실에 안주하는 삶에 안타까움을 느낄 것이고, 헛된 욕망이라 여긴다면 현실을 외면하는 삶이 한심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기에 곰스크행을 포기한 뒤 시골마을에서 아이를 낳고 집과 정원을 가꾸며 현실에 만족하는 아내와,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마을의 일원이 되어서도 곰스크행 기차를 포기하지 않는 ‘나’. 이들 중 누가 옳고 그른지 정답은 없다. 어쩌면 아내는 ‘나’의 또 다른 자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결국 곰스크행을 포기하고 간이역에 머물게 된 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에서 비롯되었을 터. 선택의 주체가 나였음을 인정할 때, 그제서야 우리는 다시 곰스크를 찾아 떠날 수도, 곰스크를 내려 놓을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만약 기차가 간이역에 서지 않았더라면, 기차에서 내리지 않았더라면, 풀밭에 살랑이는 바람에 취해 기차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아니 '나'는 곰스크에 도착했을까? 그랬다면 곰스크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을까?

어쩌면 곰스크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았을 수도, 어쩌면 그곳에서 또 다른 ‘곰스크’를 꿈꾸었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간이역이 있던 시골마을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며 다시 돌아오고 싶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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