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와 노래 줄줄이 외우고 ‘K-POP’관련 행사도 열어
삼성·LG 가전제품 인기 최고…전기압력밥솥, 화장품도 상종가

안남영의 赤道일기(11)
전 HCN충북방송 대표

이른바 한류. 이것은 우리나라 소프트파워의 성과물이다. 이걸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학교 때 한국어가 영어처럼 국제공용어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상상해 본 일이 있다. 세계사를 배우면서 영어가 패권을 누리게 된 사연을 알게 됐지만, 한국어로서는 영어가 요즘 말로 ‘넘사벽’이었기에 씁쓸해했던 기억이 있다. 고교시절 훈민정음의 과학성을 배운 뒤로는 한글이 만국 발음기호로 채택될 가능성이 있을까 궁금했다. 언어강대국의 꿈 대신에.

그 시절로 돌아가면, 다른 나라에서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배운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40년쯤 흐른 지금 인도네시아에 와서 한국어 위상이 수직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 뿌듯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하여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해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인도네시아 동부 슬라웨시 섬 바우바우시의 찌아찌아 부족사회에서처럼 한글이 대접받았던 일은 생각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과 세종학당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점점 더 커져 감을 확인할 수 있다.
 

작년 11월20일 람붕망꾸랏대학교 ‘한사랑클럽’이 한국학센터 홀에서 주최한 ‘한국신드롬’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그룹댄스를 선보이고 있다.

4월에는 ‘2017 한국문화축제’도 개최

이처럼 한국어에 대한 높은 관심은 무엇보다 대중문화 영향이 크다. 마니아도 많다. 자카르타에서 내게 인도네시아어를 가르쳤던 한 젊은 여성 강사는 소지섭 광팬에다 한국민요를 벨소리로 쓸 정도로 한국 마니아다. 특히 소지섭에 대한 그의 ‘짝사랑’은 종종 동료 강사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그때마다 함께 웃어넘기지만 한국에 대한 동경이 없으면 보일 수 없는 그의 행동에서 주머니 속의 조국애를 매만져 보게 된다.

몸담고 있는 학교의 일부 선생은 사무실에서 컴퓨터에 종종 한국 노래를 틀어 놓고 일을 한다. 우리 가사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한 자막을 따라 부를 수 있는 콘텐츠다. 선생들 중 가끔 한국 드라마 이야기를 꺼낼 때면 좀 곤혹스럽다. 내가 미처 못본 드라마라서다.

이들은 한국드라마의 이야기 전개가 인도네시아와는 달리 무척 재미있다고 한다. 젊은이 취향의 아이돌 그룹 ‘족보’를 한때 외운다고 외워봤지만, 신생 그룹들의 신곡까지 섭렵하기엔 둔해진 내 감각과 기억력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그래도 그들의 정보력을 뒤따라가는 마음은 즐겁다. 축구사랑이 남다른 이곳 남자들의 경우 한국의 스포츠에도 관심이 높다. 같이 근무하는 한 남자 선생은 2002년 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선수 이름을 줄줄 외운다. 놀랍게도 그는 터키 전에서 나온 홍명보의 실수 장면까지 생생히 기억했다.

이곳 반자르마신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는 현지인끼리 한국 관련 행사를 자주 연다는 사실이다. 한국 가요와 댄스를 즐기는 동아리끼리 정보 교류와 무대 대결을 펼치는 느슨한 협의체-panitia, 수십 개에 이른다-가 있는데, 이들이 주최한다. 하루 종일 계속되는 행사는 이들의 발표무대이면서 경연무대이기도 하다. 일반인 대상으로 입장료를 받으며 흥행도 노린다.

그중 특히 람붕망꾸랏 국립대 학생동아리인 ‘한사랑클럽’은 한류 확산의 교두보다. 현재 재학생 회원 수는 7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졸업생도 함께 참여하는 독자적 무대를 매년 2차례 올린다. 지난해 11월20일 한국학센터에서 열린 자체 축제에서는 부채춤과 한국어 연극까지도 선보이는 ‘극성’을 보였다.

한사랑클럽 야니(여) 회장은 “해마다 K- POP 관련 연합행사가 2~3회씩 열린다”며 “그만큼 반자르마신에 한국문화를 사랑하는 저변이 넓은 편”이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반자르마신의 코이카 봉사단은 한사랑클럽과 공동으로 오는 4월23일 ‘2017 한국문화축제’를 연다. 노래와 춤 경연, 충북음악협회 초청 공연, 한국어 퀴즈대회가 무대에 오르고 그 아래서는 한식·한복·붓글씨·종이접기·전통놀이 등 다양한 체험 행사가 진행된다.

행사장으로 대형 체육관을 잡은 것도 그렇지만 내용 면에서도 종래 볼 수 없었던 시도여서 벌써부터 화제가 되고 있다.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홍보를 막 시작했는데 중·고·대학생은 물론 일반인들까지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 학교 식당의 40대 아주머니들은 “꼭 가서 김치를 맛보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의 산수와 도시 풍경이 이곳 사람에게는 퍽 매력적인가 보다. 우리 학교 선생들도 한국의 4계절과 자연에 대해 호기심이 많다. “한국을 꼭 방문하고 싶다”, “안내 좀 해 줄 수 있느냐”, “항공요금이 얼마냐” 등 내게 건네는 질문이 의례적인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드라마에서 본 아름답고 세련된 한국의 모습을 언젠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염원이 읽힌다. 지난 2월 중순 가족과 함께 서울과 전주,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한 선생은 “추위에 혼났다”는 말을 자랑삼아 하고 다니면서 많은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반자르마신 중심가 한 가전제품 매장의 LG와 삼성 코너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동선을 따라 나란히 배치돼 있다. 평일 오전은 고객이 뜸하다.

삼성, LG의 선양 눈부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한국을 우러르는 또 하나의 시각은 가전제품을 통해서다. 삼성과 LG의 선양이 사실 눈부시다. 학생들은 내가 쓰고 있는 컴퓨터와 휴대전화 상표를 보고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부러움을 표한다. 얼마짜리인지를 물어오기도 한다. 한국산 IT제품은 높은 가격 때문에 중국제가 더 많아 보인다. 하지만 이곳의 주요 전자 상가에 가보면 높아진 한국제 위상으로 어깨가 으쓱해진다. 간판도 그렇지만 삼성과 LG 코너가 어디나 가장 크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소니 제품이 구석으로 몰린 모습에서 일말의 쾌감을 덤으로 느낀다면 내가 국수주의자일까?

지금 내가 사는 집의 주인은 계약 전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을 삼성 제품으로 구비해 놓았음을 자랑삼아 이야기했는데, 여기엔 집세의 강보합세를 유지하려는 전략이 숨어 있다. 그런가 하면 호텔이나 학교 등에서 사용하는 에어컨 중에는 LG 제품이 압도적으로 많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곳 고급 전기압력밥솥 시장에서 용마전자의 점유율이 90%에 달한다고 들었다.

화장품 하면 일제보다 한국산을 최고로 치는 이들이 많다. 젊은 여성이라면 적어도 5개의 한국 브랜드를 꼽을 줄 안다. 탈모예방에 좋다는 샴푸 이름까지 꿰고 있는 이들도 있다. 또 아이들의 경우 한국에서 건너왔다면 그것이 옷이든, 필기구든, 하다못해 스티커까지도 눈동자를 키우고 바라본다.

이렇듯 한국에 대한 과분한 관심 속에서 봉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나로선 벅찬 복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하건대 대한민국의 눈부신 압축 성장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부모님 세대부터 눈물과 땀으로 이룩해 낸 거대한 서사가 다방면으로 소프트파워를 키운 끝에 먼 이국땅에 장하고 거룩한 금자탑이 되어 있음을, 나는 매일 목도하며 산다. 눈물겹도록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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