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레스닉의 SF 소설 <키리냐가>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키리냐가 마이크 레스닉 지음.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 펴냄.

옛날에 무릉(지금의 후난 성 타오위안 현)에 살던 어느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복사꽃이 피어 있는 수풀 속으로 잘못 들어갔는데 숲의 끝에 이르러 강물의 수원이 되는 깊은 동굴을 발견했다. 그 동굴을 빠져나오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별천지가 펼쳐졌다. 그곳의 사람들은 진대의 전란을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그때 이후 수백 년 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지내왔다는 것. 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가상의 선경 이야기다. 이상향 또는 유토피아, 그런 곳이 정말 어딘가에 있을까?

마이크 레스닉의 SF 소설 <키리냐가>는 유토피아의 단면을 보여준다. 시간적 배경은 2123년. 소설의 화자 코리바는 케임브리지와 예일에서 공부한 노인이다. 그는 유럽 문물이 들어오기 전 키쿠유족의 역사·풍습·종교 등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갖추고 부족의 주술사인 문두무구를 자처한다. 그는 유럽 문명 일색이 돼버린 조국 케냐의 현실을 한탄하며 뜻을 같이하는 자들을 이끌고 ‘키리냐가’로 떠난다.

키리냐가는 18세기 이전의 아프리카 자연환경을 재현한 소행성이며 키쿠유족의 전통 방식으로 살아가는 공간이다. 코리바는 부족의 원형과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영아 살해나 노인 유기도 서슴지 않는다. 비인도적이라는 비난은 유럽인의 관점일 뿐, 성스러운 신 ‘응가이’의 율법은 절대적으로 옳다는 그의 신념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코리바는 예기치 못한 갈등에 직면한다. 추락한 우주선 조종사를 치료하기 위해 온 유럽인 의사는 코리바가 치료하지 못한 아이를 쉽게 고쳐서 문두무구인 코리바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기도 하는데, 그런 외부 요인보다 치명적인 문제는 사회 내부에서 불거진다.

이를테면, 문두무구의 자질을 갖춘 카마리는 누구보다도 영리하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교육받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원한다면 언제든 키리냐가를 떠날 수 있다는 코리바의 말에 카마리는 말한다. “여기가 제 고향이에요. 이 사람들이 제 동족이고요. (…) 전 제 남편의 아이들을 기를 거고 남편의 샴바(농장)를 갈 거예요. 남편을 위해 땔나무를 모아 주고, 음식을 만들어 주고, 옷을 짜줄 거예요. (…) 전 불만 없이 이 모든 일을 해낼 거예요. 코리바 할아버지! 제게 단지 읽고 쓰는 걸 배우도록 허락만 해주신다면요!”

그러나 코리바가 끝내 허락하지 않자 카마리는 자신이 만든 언어로 ‘나는 왜 새장에 갇힌 새가 죽는지 아네― 왜냐하면 그 새들처럼, 하늘 맛을 보았기에.’라는 유언을 남긴 채 삶을 포기하고 만다. 후계자로 지명되어 교육받은 은데미는 자라면서 부족의 정체성과 미래에 의문을 갖고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키리냐가를 떠나버린다. 패기 있고 똑똑한 젊은이들은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고 정체된 사회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간다. 2세대 족장들은 코리바의 지혜와 지도력에 의문을 품고 저항한다. 변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열망 앞에 무력해진 코리바는 결국 키리냐가를 떠나 케냐로 돌아오고 만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사회는 실현될 수 있을까? 도전할 필요도 없고 극복해야 할 곤란도 없는 사회는 정말 이상적인 사회일까? 유토피아는 존재하지도 않고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라는 역설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실현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꿈의 여부가 중요하니까 말이다.

보다 더 나은 곳,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고 찾으려는 역동성 자체가 유토피아는 아닐까. 그게 뭐든 간에 다른 세계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어떤 문화든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아니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고 발전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신채호의 정의도 그런 의미로 다가온다. 적절한 관계 맺기에 실패하는 부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다는 경계일 터이다.

키리냐가는 화자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는 유럽인의 기술로 건설되고 운용되는 아이러니의 결정체다.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 실험적 공간이며, 실패는 처음부터 예정돼 있었던 셈인지도 모른다. 전통은 선이요 외세는 악으로 간주한 이분법적 사고 또한 유럽인들의 것이다. 공간과 상황 설정이 다소 억지스럽고 기형적이긴 하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은 인간의 본성과 사회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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